
2020년에는 연말 콘서트를 하려고 포스터까지 만들어놓고 결국 공지하기 전에 취소했다. 위험한 변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겨울도 변수는 많았다. 그렇지만 공연하기로 했다. 이런 세상에서 공연을 만드는 마음은 무엇일까. 나도 잘 모른다. 내 직업이기 때문에 잘해내야 한다는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 이외의 다른 감정은 어쩐지 쉽게 꺼내기 어려운 기분이 들고, 꺼낼 여유도 없었다.
그날은 12월의 어느 오후였다. 왠지 지치고 예민해진 나는 작은 것에도 눈물이 자주 났다. 피곤하면 금세 뭉쳐버리는 어깨를 익숙하게 들썩이며 공연기획 회의를 다녀오던 길에 마주친 그는 홍대 길가의 한 꽃 가게 앞에 앉아 있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오래된 흙과 초라한 플라스틱 화분에 심어져 있는 작은 동백나무 화분. 금방 샤워했는지 시린 겨울의 아스팔트는 젖어 있었고, 물 자국에 반사된 상점의 불빛은 그를 비춰주는 조명 같았다.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는 그를 보고 마음 어딘가가 찡해졌다. 오들오들 떨지만 어떻게든 살겠다고 꼿꼿한 그 모습이 신경 쓰였다. 피로했던 나는 동백나무에 감정이입을 하고 말았다. 연녹색의 작고 풋풋한 꽃망울이 오밀조밀 달린 그 사이 빨갛게 물들어가는 꽃봉오리가 하나 있는 이 아이를 내가 감히 피워보리라. 딱딱하게 뭉친 어깨 근육 위에 동백나무 화분을 업어 메고 씩씩하게 집으로 향했다.
식물이 닿으면 죽어버리는 저주받은 손을 가진 나는 수많은 희생을 거쳐 그들을 너무 빨리 죽이지 않는 방법 정도만 간신히 터득하고 있었다. 포털에 동백 키우는 법을 검색했다. 개화 시기는 1~2월, 10℃ 전후의 낮은 온도에서 꽃이 피고, 너무 따뜻하면 꽃을 피우지 않는다 했다. 꽃이란 따스한 공기 속에서 팝콘 터지듯 해맑게 피는 것이라 여겼는데, 몹시 추운 곳에서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의 특징도 나를 안타깝게 했다. 그에게는 햇빛과 바람, 서늘한 온도가 필요했지만 한겨울을 맞은 내 집은 난방으로 무척 따뜻했고, 베란다에 화분을 두기에는 너무 강추위가 몰아치는 시기였다. 어느 정도 조치를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일단 그를 실내에 두고 눈앞의 바쁜 일을 끝내고 보살피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나를 보살피기도 어려운 기분을 종종 느꼈다. 행복하고 충만한 연말 공연을 마치고 나서 후련하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좋은 시간을 보냈는데 멍한 기분이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심리상담소 선생님을 만나 겨우 마음속의 이야기를 꺼내보았다.
“너무 쉽게 울어버리는 아이 같은 마음이 있어요. 그 마음이 자주 튀어나오면 일을 잘해내기 어려워서 싫어요. 그 애를 자주 가뒀더니 이제 잘 나오지 않네요. 괜찮긴 한데 내가 진짜 괜찮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처럼 잘 지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혼자 고민하고 노력했을까요. 아이 같은 마음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마음이 힘들 때 무시하지 말고 지금 내가 힘들구나. 그걸 봐주세요.”
알고 있지만, 항상 잊게 되는 말. 자신을 바라보고 인정하라는 말. 그렇지만 그런 나를 바라봐도 무얼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키울 줄 모르는 동백나무처럼 묘하게 방치된 것 같다. 나는 공연을 하는 동안 좀 불안했나? 그러면서도 연결될 수 있었음에 안도했던가? 그 안도감이 긴장된 나를 완전히 이완시키지 못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나?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될까. 내 얼굴을 바라보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눈빛의 상담 선생님이 어떤 표정일지 상상하려 했으나 어려웠다. 그 표정을 봤다면 애처럼 울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지만.
동백의 빨간 꽃봉오리는 결국 까맣게 메말라갔다. 물이 부족했을까. 햇빛이 적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백을 피워내는 것은 웬만한 정성과 기술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다. 말라붙어 있는 꽃봉오리를 ‘에라, 모르겠다’ 떼어버렸을 때 그 안에 촉촉하고 향기로운 가능성의 꽃잎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걸 봤다. 나는 피어오르기만 하면 될 수많은 꽃잎을 하염없이 만지며 죄책감을 느꼈다. 곧이어 불그스름하게 다시 부풀어 오르는가 싶었던 꽃봉오리들도 겨울이 다 가도록 피지 않았다. 단념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화분을 베란다에 들락날락하며 나무에 바람과 햇볕을 쬐어주고 있다. 다음 해 겨울에는 더 잘해줄게. 피고 싶을 때 마음껏 꽃피울 수 있도록. 그렇지만 힘들면 딱히 꽃을 피우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동백꽃이 안 피어도 너는 원래 동백나무니까.
나도 이런 식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거지? 왜 내 마음을 챙기는 것도 무슨 업무를 보는 기분인지. 동백은 그런 내가 가소롭기라도 한 듯 메마른 꽃봉오리를 맺은 채 멈춰 있다. 나의 어리석음을 충분히 느끼고 나면 꽃망울은 괜찮다는 듯이 툭 떨어질 것이다.
김사월 메모 같으면서도 시적인 노랫말을 쓰는 싱어송라이터. 2020년 에세이 〈사랑하는 미움들〉을 썼고, 석 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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