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유튜버 겨울서점이 밤 12시에 읽고 싶었던 책?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엘르보이스] 유튜버 겨울서점이 밤 12시에 읽고 싶었던 책?

밤 12시, 자기혐오가 찾아올 때마다 읽은 책. 그 혼돈 속에서 찾은 행복의 기준

이마루 BY 이마루 2022.02.18
 
당신의 혼돈 속에 당신의 행복

지난해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에 올린 영상 중 가장 시청자의 참여도가 높았던 영상 제목은 다음과 같다. ‘밤 12시, 자기혐오가 찾아올 때마다 읽은 책’. 내가 생각하는 삶의 의미에 대해, 내가 존재의 의미를 회의할 때 느끼는 감정에 대해, 또 그럴 때 읽는 책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은 영상이었다. 댓글창에는 제각기 다른 이유로 느끼는 같은 감정에 대한 토로가 쏟아졌다. 순식간에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고, 댓글을 단 사람들은 서로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감정의 크고 작음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많은 사람이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순간을 맞이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왜 살아갈까?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한번 던지기 시작하면 멈추기 어렵다. 이 질문에 얽혀들기 시작하면 세상이 갑자기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세상의 혼돈과 나의 무력함. 지금껏 어디 숨어 있다가 나타났을까? 나는 계속 살고 있었는데…. 그런 감각은 마치 매직 아이를 보듯 떠오른다. 그동안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보지 않았던 것처럼, 또렷하게 볼 힘조차 없어지고 나서야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세상의 무질서는 두려움의 원천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질서를 질서로 만들고 싶어 한다. 내가 나를 꼼꼼하게 통제해서 성취하면 모든 게 바뀔 수 있다고 말한다. 성취가 자존감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삶의 의미는 거기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력한 인간이 예측 불가능한 자연을 길들여 풍요를 달성했기에 우리는 더욱 자연을 조각조각 잘라내 인간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식은 그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세계의 혼돈이 크게 느껴지면 우리도 어깨를 넓히고 털을 세운다. 그것이 근대의 방식이다. 그것이 인간의 방식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물고기에 이름표를 꿰매고 있다. 바닥에 널브러진 물고기 사체를 하나씩 손으로 집어서, 다른 한 손에 바늘을 들고, 떨어진 이름표를 사체의 살에 꿰매고 있다.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지진으로 다 엎어져버린 연구 결과물에 다시 이름표를 찾아 붙이는 한 과학자의 집념으로. 그 광경은 괴이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 사람에게서 삶의 의지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책을 쓴 룰루 밀러의 바람이었다. 지고, 지고, 절망하고, 또 절망해도 흔들리지 않고 바늘을 집어 드는 힘과 끈기.
 
‘네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18세기 칸트의 선언은 자연의 꼭대기에 선 인간을 표상한다.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해석하면 세상은 인간의 것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확고하다. 박물관, 동물원, 박람회. 무한의 자연으로 존재하던 것들이 갈라지고 분류되고 라벨링된다. 너른 바다와 강 속을 헤엄치던 물고기는 에탄올이 든 통에 갇혀 아마도 우주 역사 이래 처음 보는 이름표를 앞에 달고 있다.
 
물고기(‘물고기’라는 말은 정말 이상하다. 죽으면 ‘생선’이 된다)에게 지성과 영혼이 있다면, 그래서 막 몸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바라본다면 이름표가 붙은 자신의 육체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난 이런 이름을 가진 적 없는데? 내 친척은 왜 저런 이름을 달고 있지?’.
 
왜냐하면 그것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혹은 인간이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선에게 치명적인 일이다. 인간은 자연에게 치명적이다. 우리는 자연과 합의한 적이 없다. 자연은 우리와 계약서를 쓴 적 없고, 쓰자고 했어도 응했을지 미스터리다.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이, 노예로 팔려간 흑인들이 계약에 응한 적 없던 것처럼. 그리고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생선에게 했던 일을 정확히 다른 종에게도 반복한다. 인간이 이름을 붙인다는데 어디 계약을 해?
 
그렇게 모든 게 우리 손아귀에 들어오면 그때는 자기혐오를 멈출 수 있을까? 바라던 것을 다 이루고 나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미안하다. 미안하지만 삶에는 의미가 없다. 그게 내가 영상에서 한 말이다. 삶에는 의미가 없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과제로 부과돼 있기에, 한 가지 답이 없기에 삶이란 피곤한 것이라고. 삶은 우리와 합의한 적 없다. 그리고 삶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기에 합의에 응해주지 않을 것이다. 삶은 인간에게 마음대로 통제되고, 라벨이 붙을 만큼 약하지 않다. 삶은 혼돈이고, 무질서는 승리하며, 성취는 무너진다. 삶은 인간의 자존감이 편안히 기댈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기를 삶에 두 가지 제물을 바치도록 태어났다. 그 두 가지는 노력과 우연이다. 인간이 세상을 정복해 나가는 동안 그런 사실은 어느새 잊혀서 우리는 삶에 덕지덕지 어설픈 이름표를 붙이게 됐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운과 우연, 사건과 사고로 이뤄지며 운과 우연, 사건과 사고는 혼돈의 다른 이름이다. 혼돈을 보는 눈을 감아버린다면, 그래서 지진이 일어나고도 바늘을 들고 물고기의 살에 이름표를 꿰매게 되면 그 바늘이 언젠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박음질하리라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통제 밖의 세계. 의미가 없는 삶. 그렇기에 겸손하게 노력하는 마음. 그것은 어느 순간 우리를 해방시킨다. 내가 자기혐오에 빠질 때마다, 나의 못남을 탓할 때마다, 나의 삶에 구멍이 나고 균열이 생긴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나의 못남을 탓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나의 오만일지도 모른다고. 그만 투덜대고, 다시 한 발짝 내디뎌야 한다. 혼돈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반가이 맞이하며.  
 
김겨울 유튜버이자 작가이자 라디오 DJ.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MBC 〈라디오 북클럽 김겨울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다. 〈책의 말들〉 〈활자 안에서 유영하기〉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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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이마루
    디자인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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