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발을 짓는 조각가, 로저 비비에_요주의 물건 #48

마를렌 디트리히부터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리고 브리짓 바르도와 카트린 드뇌브까지. 당대를 풍미했던 여성들을 위해 슈즈를 만들던 사람, 로저 비비에에 관한 이야기.

BY양윤경2020.09.24
왜인지 모르겠지만, 가을이 되면 오래된 영화 속 여인들의 모습이 보고 싶어진다. 클래식한 옷차림과 곧은 자세, 잘 빗어 넘긴 머리카락, 그윽한 눈빛과 낮은 음성 같은 것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옛 여인들의 모습은 풋내 나는 요즘의 트렌디한 것들에 지친 눈을 정화해 준다. 오늘은 카트린 드뇌브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영화 〈세브린느〉 속의 우아하고 지적인, 그리고 동시에 농염한 모습. 오늘의 〈요주의 물건〉은 아래 사진 중 마지막 컷에서 그녀가 신고 있는 신발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카트린이 신고 있는 신발의 이름은 벨 비비에(Belle Vivier). 1965년에 로저 비비에가 이브 생 로랑이 발표한 몬드리안 컬렉션을 위해 디자인한 신발이다. 심플한 블랙 펌프스를 크롬 도금의 커다란 버클로 장식한 것이 특징. 2년 뒤인 1967년, 이브 생 로랑이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영화 〈세브린느(Belle de Jour)〉의 의상을 직접 스타일링하게 되면서 카트린 드뇌브가 착용했고, 이후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당시 프랑수아 프리미에 거리에 있던 로저 비비에 부티크로 여성들이 몰려와 거리가 가득 찰 정도였다고!). 이 직사각형의 버클 장식은 오랫동안 살아남아 ‘로저 비비에’라는 이름을 들으면 단번에 떠오르는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1953년 로저 비비에의 모습. Ⓒ게티 이미지1953년 로저 비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대관식에서 신을 신발을 디자인했다. Ⓒ게티 이미지
1907년에 태어난 로저 비비에는 1924년, 파리 예술 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했고 2년 뒤, 신발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면서 슈즈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무대 위의 여인들에게 매료되었는데, 물랑 루즈, 카지노 드 파리, 폴리 베르제르 극장 등을 자주 방문하면서 프랑스 출신 가수 미스탱게트와 배우 조세핀 베이커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들을 위해 처음으로 맞춤 구두를 만들었다. 

크리스찬 디올과 로저 비비에의 협업은 쿠튀르 디자이너가 슈즈 디자이너가 제휴한 건 당시엔 획기적인 일이었다. Ⓒ게티 이미지, rogervivier.com크리스찬 디올의 1961 F/W 컬렉션을 위한 로저 비비에의 신발들. Ⓒ게티 이미지, rogervivier.com2010년, 영화 〈로빈 후드〉의 케이트 블란쳇을 위한 로저 비비에의 신발 디자인. Ⓒ게티 이미지, rogervivier.com
1937년, 파리 루아얄 거리 22번지에 그의 첫 번째 아틀리에를 연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인사들의 신발을 제작했다. 크리스찬 디올의 슈즈 아틀리에의 전속 디자이너로 활약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그리고 1953년 6월 2일, 로저 비비에 하우스에 기념할만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을 위한 신발(보석을 세팅한 골드 펌프스)을 만든 것이다. 당시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 중 그는 유일한 프랑스 출신의 디자이너였다. 이후 에귀유 힐과 쇼크 힐, 버귤 힐, 벨 비비에 등 아름다운 슈즈를 세상에 선보인 무슈 로저 비비에는 1998년, 9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로저 비비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게라르도 펠로니가 만든 슈즈들. Ⓒ게티 이미지로저 비비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게라르도 펠로니가 만든 슈즈들. Ⓒ게티 이미지로저 비비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게라르도 펠로니가 만든 슈즈들. Ⓒ게티 이미지로저 비비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게라르도 펠로니. Ⓒ게티 이미지
그리고 2018년, 게라르도 펠로니가 로저 비비에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16년 동안 브랜드를 이끌었던 브루노 프리조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그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프랑스 슈즈 브랜드에 젊은 감각을 더했다. 벨벳이나 새틴, 자카드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고, 푸시아 핑크와 네이비, 파스텔 컬러 등 생기발랄한 컬러를 더했으며 기존의 네모 버클의 크기를 과감하게 확대하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진 다양한 백과 부츠, 그리고 비브런(Viv' Run)이라는 이름의 스니커즈까지! 게라르도 펠로니는 브랜드가 가진 기존의 유산에 현대 여성들이 원하는 것을 적절히 녹여내며 다시 현대적으로 살아 숨 쉬는 브랜드로 만들어가고 있다. “명랑한 즐거움을 이야기하는 젊은 로저 비비에를 보여주고 싶었다”던 그의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