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어쩐지 다 마시고 손으로 찌그러뜨린 코카콜라 캔처럼 반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그런데도 왠지 멋스러운(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은색의 알루미늄 러기지를 떠올린다. 십오 년은 족히 사용한 것처럼 낡아버린 모습이야말로 리모와의 진짜 멋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리모와는 1898년에 독일 쾰른에서 탄생한 브랜드다. 그 전신은 파울 모르스첵(Paul Morszeck)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든 러기지 브랜드로, 배와 마차를 타고 긴 여행을 다니는 상류층을 위해 만든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나무 트렁크가 주 아이템이었다. ‘리모와’라는 이름이 탄생한 것, 지금과 같은 알루미늄 재질의 러기지가 처음 등장한 것은 파울 모르스첵의 아들 리처드 모르스첵(Richard Morszeck)이 가업을 이어 받았을 때의 일이었다. 1937년, 리처드 모르스첵은 배와 마차를 타고 여행하는 시절이 저물고 비행기 여행이 대중화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가벼운 여행용 트렁크를 원한다는 것도.


리모와 이야기의 백미는 바로 여기부터다. 이전보다 더 가벼운 트렁크를 만들려 애쓰던 중 가죽 가방 공장에 화재가 발생했다. 큰불에 공장에 있던 나무와 가죽은 모두 타버렸지만 가방의 부속을 위한 재료였던 알루미늄은 멀쩡했다. 그것이 리모와가 경금속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화재에 강하고 가볍고 튼튼한 세계 최초의 알루미늄 트렁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리모와의 베버리 힐스 부티크 오픈파티에 전시된 알루미늄 수트케이스. @게티 이미지
경량 항공 전용 알루미늄과 마그네슘의 복합 소재의 이 트렁크는 독일 장인의 수작업으로 90단계 이상의 제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알루미늄 소재의 러기지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다. 내용물을 충실히 지키지만 자체 내구성은 약하다는 것. 폴리카보네이트 소재에 비해 쉽게 찌그러지고 긁힌다.
하지만 그것은 또 그것대로의 매력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리모와를 선택한다. 러기지 앞뒷면의 상처들, 그리고 거기에 장식된 알록달록한 스티커들이 자신의 지난 경로를 말해준다고 여기는 사람들. 리모와가 자주 사용하는, “Every case tells a story”라는 문장을 믿는 사람들. 그들이 알루미늄 트렁크를 자신의 평생 여행 메이트로 선택하는 용감한 사람들이다.

.
*트렌드를 뛰어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지닌 물건 뒤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 김자혜 작가의 ‘요주의 물건’은 매주 수요일에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