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블랙홀
몇 년 전, 추운 겨울이었다. 학교 근처에 가면 모든 학생이 노스페이스 패딩을 입고 모여있었다. 가볍지 않은 금액의 패딩이 크게 유행하면서 부모들이 경제적인 부담감을 느낀다는 게 뉴스에 난 적도 있다. 최근에야 특정 브랜드의 패딩에서 롱패딩으로 유행이 슬쩍 바뀌긴 했지만, 또렷하게 유행하는 아이템이 있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이런 현상을 트렌드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비슷한 상황이 사회 전반에 계속해서 나타난다. 가벼운 예로 나의 남성 친구들은 모두 투블럭 컷을 하고 다닌다. (최근에는 투블럭 컷에 앞머리만 파마하는 게 유행이라고 한다) 또 데이트 앱에 접속해서 프로필 사진을 살펴보면 남녀불문 모두 비슷해 보인다. 똑같은 포즈와 똑같은 앵글, 비슷한 필터를 거친 사진을 보다 보면 누가 누구인지 쉽게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요즘은 몸매가 멋지게 드러난 인증샷을 피트니스에서 찍는 게 유행이다. (다수의 친구가 내게 고백했다. 사실은 완벽한 ‘프사’를 건지기 위해 피트니스에 다닌다고!)

게티이미지
봄날 여의도에 모인 수백 대의 DSLR, 산, 아니 공원으로 몰려든 아웃도어 룩으로 무장한 사람들. 이것들은 한국 사회의 획일적인 문화를 보여주는 사소한 예시일 뿐이다. 물론 한국 사람 모두가 이런 트렌드를 따라간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표면에 드러나는 거대한 트렌드가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거라고 상상해보라! 누군가를 제대로 알아 가기도 전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아버린다면, 그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다. (고맙게도 나는 개성이 분명한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다)
획일적인 문화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인간은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끼니까. 아마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에 지나치게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비용 역시 늘어날 거다. 현재 한국이 누리는 눈부신 경제 발전은 다수의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였기에 가능했을 거라 믿는다. 그렇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다. 모두가 하나의 길 위로 나란히 걷기엔 삶의 모양이 다채로워졌다. 흔히 좁은 문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야만 한다고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회의 극히 일부분만 그 좁은 문을 걱정 없이 통과할 수 있다. 학원, 특목고, 수능, SKY 대학, 대기업, 결혼, 분양, 육아뿐만 아니라 비싼 아웃도어 룩을 입고 산 정상에 서거나 더 나아가 xx 상조 가입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다.
한국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만성적으로 느끼는 피로감과 불행의 원인이 이것과 관련 있는 게 아닐까. 대다수가 획일성과 개성의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해도 불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머물러 있다. 다수의 생각을 따르면,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옅어지는 개성을 감수해야 한다. 반대로 개성을 선택하면, 만성적인 불안정성과 따돌림을 감내해야만 한다.
이 글을 곡해해서 읽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사회적 공식을 자연스레 따르면서 행복한 사람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도 문제를 제기한 이유는, 획일적인 선택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나이고 싶다. 당신은 당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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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살이 9년 차, 영국에서 온 남자 라파엘 라시드가 쓰는 한국 이야기는 매주 금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