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깝게는 트로트 열풍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유산슬 붐을 일으킨 ‘뽕뽀유’, 멀게는 장기하와얼굴들, 혁오, 10cm 등을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만든 〈무한도전 - 고속도로 가요제〉시리즈를 탄생시킨 김태호와 유재석. 빠른 촉으로 잡은 음악계 흐름을 발판으로 누구보다 크게 판을 벌릴 줄 아는 이들이 만든 놀이터에 지금 레트로 음악이 스며들었다. 유재석, 이효리, 비 세 사람이 만들어낸 거대한 화제성이 유행을 이끌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레트로 음악의 인기가 하루이틀에 완성된 건 아니다.
실제로 한국의 레트로 열기는 이미 수년 전부터 매해 끓는 점을 높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누울 자리를 만든 건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였다. 2012년에서 2016년까지 4년간 총 세 편의 작품이 제작된 이 시리즈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후반까지 한국 대중가요를 무더기로 쏟아냈다. 드라마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된 옛 가요는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고증된 소품만큼이나 큰 화제를 모았다. 그때 그 시절 그 음악을 들으며 자란 세대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모르고 자란 세대에게는 더없는 신선함을 전했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렇게 ‘추억팔이’ 언저리를 맴돌던 레트로 음악은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색다른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키워드는 두 가지였다. 레트로 음악을 ‘발굴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 그리고 레트로 음악을 ‘하는’ 음악가들의 등장이었다. 우선 ‘탑골가요’라는 고유명사를 탄생시킨 옛 음악 발굴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새로운 시대정신이라는 유튜브와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밀레니얼들은 웬만한 전문가보다 낫다는 추천 동영상 알고리즘을 통해 시간의 먼지 속에 숨어 있던 옛 가요들을 하나하나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가장무도회’와 ‘리듬 속의 그 춤을’을 부르는 김완선의 자유로우면서도 절도 있는 몸짓을 ‘저 세상 퍼포먼스’라 부르며 찬양했고, ‘Don’t go baby’를 외치는 ‘쿨’하고 시크한 이상은의 무대에 ‘나는 왜 저 때 태어나지 않았냐’며 한탄했다. 그 가운데 ‘앞서가도 너무 앞서갔다’는 평가를 받으며 급부상한 양준일은 JTBC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3〉 러브콜에 응하며 2019년 연말을 가장 뜨겁게 보냈다. 18년 만에 음악 방송에 출연한 양준일을 응원하기 위해 ‘사랑해요 양준일/출국금지 양준일’이라는 응원법을 목놓아 외치는 팬들 속에서 앳돼 보이는 10~20대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야말로 신드롬이자 새로운 흐름이었다.
가요계에 자연스럽게 내려앉은 이 오래된 미래는 결국 재능 있는 새 시대의 음악가들마저 포섭했다. 박문치, 죠지, 민수 등 최근 ‘음악계 대세’로 불리는 이름 가운데 레트로와 분리해서 말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문치는 싹쓰리 타이틀곡 리스트에 켄지, 김도훈, 서용배, 심은지 등 유명 K팝 작곡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대체 불가한 레트로 퀸의 입지를 굳혔다. 실제로 싱글 ‘울희액이’와 ‘네 손을 잡고 싶어’, ‘널 좋아하고 있어’ 등을 통해 90년대를 살았던 사람보다 90년대 정서를 더 깊이 이해하는 음악을 꾸준히 들려준 그는, 90년대 걸 그룹 컨셉트를 완벽히 재현한 치스비치의 프로듀서이자 멤버로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죠지와 민수의 경우는 박문치보다 덜 본격적이지만 음악이 가지고 있는 기본 작법과 정서가 과거에 기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싱어송라이터들이다. 세련되기보다 친숙한, 뾰족하기보다 푸근한 가치를 중시하는 이들의 음악은 노래의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기억 속 깊숙이 자리한 옛 기억들을 소환한다. 그들이 배후에 박문치를 두는 순간 ‘바라봐줘요’(죠지)나 ‘미니홈피’(민수)처럼 본격적인 ‘그때’를 그려내는 노래가 탄생한다는 것 역시 흥미로운 포인트다.
이렇듯 90년대생 젊은 음악가들의 선전이 눈에 띄는 가운데 기린의 존재는 조금 더 특별하다. 한국의 80~90년대를 레퍼런스로 삼은 각종 유무형 콘텐츠에서 싹쓰리까지, 지금 유행하고 있는 코리언-레트로 결과물의 대부분은 기린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이미 10년 전부터 ‘(한국적) 뉴 잭 스윙’ 외길 인생을 걸어 오고 있는 이 ‘레트로 선배님’은 데뷔 앨범 〈그대여 이제〉(2011)부터 후디와 함께한 최신 싱글 ‘오래 오래(Ore Ore)’에 이르기까지 음악과 의상, 뮤직비디오 등을 통틀어 ‘90년대 한국’이라는 명확한 레퍼런스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다.
박재범, 수민, 박문치 등 그와 컬래버레이션하는 음악가들의 면면과 그가 수장으로 있으며 재규어 중사, 브론즈, YUNU, 모과 등 레트로 음악가들이 잔뜩 소속된 레이블 에잇볼타운(8ballTown)의 뚜렷한 존재감도 놓치기 아쉽다. 기린이 수민과 함께 결성한 레트로 듀오 CLUB33, ‘이게 2019년 음악이라고?’를 몇 번이고 외치게 만든 브론즈의 정규 앨범 〈East Shore〉까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온통 레트로다.
재미있는 건 이들이 입 모아 말하는 자신들의 음악에 대한 항변 아닌 항변이다. 레트로 음악가들은 늘 자신들이 그 시절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저 여느 음악가들이 그렇듯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따르다 보니 이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음악을 만들게 됐다는 것이다. 옛 음악을 즐겨 듣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물어도 별다르지 않다. ‘록이나 힙합, 발라드나 K팝을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시티 팝을 좋아하는 것뿐’이라거나 ‘요즘 유행하는 가요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던 내 심장이 90년대 가요에 반응했을 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레트로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밝은 미래를 꿈꾸던 명랑한 시대의 한가운데에 곱고 좋은 것만 모아 만든 노래들이 남긴 진액이다. 그 위에 여유 있던 시절의 정취가 주는 낭만 한 스푼까지 떨어뜨렸으니, 그런 음악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심지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한 현실의 한가운데에 떨어진 마법의 구슬이라니, 레트로 붐은 당분간 쉽게 꺼지지 않을 것 같다.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