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엘르 보이스] 집에 남자분 안 계세요

한 번쯤 들어본 말이죠? 이 말에 익숙한 우리에게.

프로필 by 전혜진 202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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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북 페어에 강연 갔을 때의 일이다. 주제는 ‘한국의 페미니즘 출판’이었고, 나는 지금까지 출간한 책과 한국의 페미니즘 논의 지형을 간단히 소개했다. 국내에서 치열했던 이슈에 여러 형태로 개입하며 출판사 봄알람이 해온 작업은 ‘여성들의 목소리에 힘을 싣는 일’로 요약됐는데, 이에 한 청중이 질문을 던졌다. 순차 통역을 통해 내 귀에 도착한 언어에 순간 마음이 서늘해졌다. “제 작가 친구들은 남성 지인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발표하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같은 주장도 남성이 이야기하는 게 훨씬 영향력 있거든요. 이런 방법을 쓰는 건 어떤가요?” 그의 제안은 낯설지 않다. 돌이켜보면 과거에 종종 채택했던 방식. 대학 시절 조별 발표가 있을 때 자연스럽게 모두 남성 조원이 발표하도록 권했고, 노동조합에서 교섭 자리에 나설 때도 남성 조합원이 교섭을, 여성 조합원이 속기나 자료 준비를 자주 담당했다. 상대가 남성의 주장을 더 주의 깊게 듣는다는 걸 알기에 채택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훨씬 조리 있게 말하는 여성이 발언 내내 경청보다 품평의 대상이 되다가 끝내 말꼬리를 잡혀 발표 자체가 엉망이 되는 일이 흔했다. 특히 나이 든 사업주들과 갑론을박하는 자리라면 화술과 설득력보다 성별이 관건일 때가 있었다. 화자가 남성일 때 훨씬 ‘안전’하다는 경험이 쌓이고 쌓여 여성들은 덜 말하고, 더 듣게 됐다.


실제로 여성의 주장이 모든 분야에서 덜 받아들여진다는 연구는 많다. 흔하고 중대한 예시로 의료 분야가 있는데, 여성 환자에 대한 의료진의 불신이 불충분한 치료와 오진, 사망 확률을 높인다. 사소하게는 통증을 호소한 환자가 남성일 경우 진통제를 받지만 여성은 항우울제를 처방받는 빈도가 훨씬 높다. 남성 환자의 통증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때 여성 환자의 통증은 신경증적 착각이라는 혐의를 받는 것이다. 삶의 여러 상황에서 경청되지 못하는 경험을 반복해 겪은 사람은 스스로 의견을 얼버무리거나, 상대가 원할 것 같은 반응을 꾸미거나, 아예 침묵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철학자 크리스티 도슨은 이 현상을 ‘진술 억압’이라 명명했다. 전문성과 실제 지식과 무관하게 남성에게 더 많은 발언권과 신용이 주어진 결과 ‘맨스플레인’ 현상이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고, 반대로 여성에게는 진술 억압이라는 시련이 관찰되는 것이다. “옆집에 가서 복도에 내놓은 자전거 좀 치우라고 말해 줘.” 친구는 이 말을 남편에게 했다. 듣고 있던 나는 왜 네가 직접 말하지 않냐고 묻지도 않았다. ‘남편이 말했을 때 바로 치워줄 확률이 높겠지.’ 이건 동시대 많은 여성의 경험적 지식이다. 실제로 여성들은 살다 보면 “집에 남자분 안 계세요?” 같은 말을 듣는다. 마치 어린이에게 “집에 어른 안 계시니?” 하는 것처럼. “애 아빠가 화가 많이 났어요”라는 유명한 문구도 어머니가 학교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남자의 권위를 빌린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전략’이 진술 억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남자의 말이 더 존중받는 건 청자 개개인의 선택과 가치관이라기보다 동시대 문화의 결괏값이다. ‘지식 보유자’의 권위를 지닌 쪽이 남성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기에 이를 바탕으로 남성은 그 권위를 행사하고, 구성원들은 그 특권을 널리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불평등한 고정관념 때문에 남성은 언제나 의견을 가져도 괜찮고 여성은 의사 표현을 삼가는 각본이 영원히 재생산된다면 여성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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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장으로 되돌아가면 여성 작가들이 중요하고 논쟁적인 이야기를 할 때 동료 남성의 입을 빌린다는 선택지는 꼭 질문자의 주변이 아니라도 지구상 어디서나 유혹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내 대답은 “불가능하다”였다. 물리적으로 타인을 빈틈없이 대변해 줄 타인이 존재할 수 없기도 하고, 남성이 여성을 대변할 수도 없다. 남성 특권은 여성 억압과 한 쌍으로 존재한다. 남성 발화자가 누리는 상대적 힘은 진술 억압을 겪는 다른 집단이 있기에 성립하는 것이다. 하물며 이게 여성을 위한 전략일 수는 더더욱 없다. 이미 무엇이든 말해도 좋은 이들의 영토를 더 넓히고, 여성 발화자를 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의 권위가 불평등하게 인정되는 환경에서 필요한 건 특권을 의심하고 불신받는 이들의 말을 더 듣는 훈련이다. 왜 훈련이냐면 정말로 연습이 필요한 일이라서 그렇다.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침묵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기도 어렵다. 나라면 하지 않을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로 점점 ‘굳이’ 말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내 의견을 가치 있는 얘깃거리로 만드는 습관이 안 붙으니 말할 기회가 주어져도 “제 경험이 어디 가서 발표할 정도는 아니에요” “제가 대표로 말할 만큼 알지는 못해요”라고 말한다. 사사롭고 때로 어리석기까지 한 이야기를 공석에서 얼마든지 하는 남성과는 대조적이다. 사실 초청 강연을 받았을 때 나 역시 의심했다. 내가 외국 행사에서 마이크를 잡을 정도로 대단한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즉시 생각을 고쳐 수락했다. 기회가 있을 때 말해야 한다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에서 너무 중요한 부분이라는 걸 알아서다. 그리하여 하게 된 이 강연은 질의응답을 포함해 여러모로 뜻깊었다. 전략에 대한 대답 역시 문화 차이를 염려한 게 무색할 만큼 공감과 호응을 얻었다. 그 자리의 발언자가 나였기에 오갈 수 있었던 이야기들의 가치를 믿는다. 이 역시 훈련이다.


이두루

페미니스트 출판사 봄알람 대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흠결 없는 파편들의 사회> 등을 펴냈다. 현실을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글 이두루
  • 사진 © unsplash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