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어느 날 여자들의 속옷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알고리즘을 떠들썩하게 만든 패션에 관해 이야기하는 <마이 아이콘>, 여섯 번째 주인공은 문가영의 슬립 드레스.

프로필 by 박지우 2025.10.09

어떤 바람은 소리 없이 불어와 모든 걸 바꿔놓는다. 패션계를 뒤흔든 속옷 바람도 그중 하나다.


지난달 밀라노에서 열린 돌체앤가바나 2026 S/S 컬렉션 쇼에 고혹적인 블랙 레이스 뷔스티에를 걸친 채 등장한 문가영

지난달 밀라노에서 열린 돌체앤가바나 2026 S/S 컬렉션 쇼에 고혹적인 블랙 레이스 뷔스티에를 걸친 채 등장한 문가영

얼마 전, 문가영은 출국길에 돌체앤가바나의 블랙 레이스 슬립 드레스를 걸친 채 등장했다. 선선한 초가을의 공기를 관통한 그의 파격적인 언더웨어 패션은 순식간에 인스타그램 피드를 점령했다. 주된 반응은 역시 ‘과하다’였다. 2023년 아시아 여성 최초로 돌체앤가바나의 글로벌 앰배서더로 발탁된 이후 문가영은 매 시즌 대담한 룩을 선보였다. 돌체앤가바나 2024 F/W 컬렉션 쇼를 뒤흔든 전신 시스루 드레스부터 2020 S/S 여성 컬렉션 쇼를 장식한 레이스 뷔스타에 이르기까지, 파격적인 란제리 룩은 공개와 동시에 늘 화두에 올랐다. 비록 시선과 반응은 갈렸지만, 문가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얇디얇은 레이스 위로 단단한 신념을 한겹 두른 듯했다.


샤넬 2026 S/S 컬렉션 쇼에 참석한 제니

샤넬 2026 S/S 컬렉션 쇼에 참석한 제니

생 로랑 2026 S/S 컬렉션 쇼에 참석한 로제

생 로랑 2026 S/S 컬렉션 쇼에 참석한 로제

리얼웨이에선 여전히 낯선 풍경이지만, 속옷은 지금 런웨이에서 단연 가장 뜨거운 주제다. 파리에서 열린 생 로랑 2026 S/S 컬렉션 쇼 프런트 로에는 다양한 언더웨어 룩이 줄을 이었다. 로제, 헤일리 비버, 찰리 XCX는 일제히 레이스 슬립 쇼츠로 저마다의 내밀한 실루엣을 드러냈다. 마티유 블라지의 첫 샤넬 쇼에서도 주인공은 속옷이었다. 제니는 마치 자기만의 방에서 막 걸쳐 입고 나온 듯한 투피스 슬립 셋업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캘빈클라인은 이번 시즌, 속옷을 그 어떤 것보다도 전면에 내세웠다. 허리를 숙일 때나 은근히 드러나던 속옷 밴드는 보란 듯이 선글라스 프레임 위로 올라섰고, 레깅스는 우아한 드레이핑 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사랑스러움의 새 시대를 연 샌디 리앙은 미니드레스에 다른 무엇도 아닌 팬티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캘빈클라인 2026 S/S 컬렉션

캘빈클라인 2026 S/S 컬렉션

샌디 리앙 2026 S/S 컬렉션

샌디 리앙 2026 S/S 컬렉션

속옷은 더 이상 감춰야 하는 존재가 아닌, 트렌드의 선두주자로 거듭났다. 여자의 가장 사적인 순간이 가장 공적인 거리 위로 당당히 걸어 나온 셈이다. 이는 사실 그닥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19세기 중반,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더욱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고안된 블루머는 오늘날 ‘발레코어’를 타고 Z세대의 옷장에 로맨틱하게 불시착했다. 마릴린 먼로의 전설적인 네이키드 드레스부터 케이트 모스의 슬립 드레스, 1990년대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담은 사라 제시카 파커의 란제리 룩까지, 속옷은 늘 시대를 관통해왔다.


킴 카다시안이 이끄는 브랜드 '스킴스'의 니플 브라

킴 카다시안이 이끄는 브랜드 '스킴스'의 니플 브라

하지만 런웨이와 리얼웨이의 시차는 분명 존재한다. 속옷이 본분을 벗어나 뻔뻔하게 거리를 휘젓기 전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한 법이다. 현실적인 속옷의 마지노선이라고 해봤자 단정한 옷 사이로 살짝 비치는 속옷 끈이나 뷔스티에 레이어링 정도일 테다. 보이지 않는 선을 넘으면 곧바로 따가운 질책이 쏟아진다. 아무리 패션이라고 해도 속옷은 여전히 경계 대상이다. 킴 카다시안이 호기롭게 내놓은 스킴스 니플 브라를 둘러싼 끝없는 논쟁이 그 증거다. 속옷을 입어도 문제고, 입지 않아도 문제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속옷을 입었지만, 동시에 입지 않은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도록 속옷의 존재 자체를 똑똑하게 감춰야만 한다.


새로운 세대는 이토록 아슬아슬한 경계를 즐기는 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정형화된 사회적 이미지 사이에서도 이들은 저마다의 내밀함을 발견한다. 노브라, 시스루, 보디슈트는 어느새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어 거리를 한가득 메운다. 돌아보면 패션은 늘 불협화음으로부터 진화해왔다. 보는 이의 불편함은 종종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경보음처럼 기능해왔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그 옷이 어쩌면 내일을 알리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언더웨어 패션은 이제 단순한 노출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감추는 대신 훤히 드러내겠다는 포부에 더 가깝다. 그 용기 속에서 속옷은 비로소 진정한 생명력을 얻는다. 헤어 롤을 만 채 거리를 활보하거나 쿠션을 두드리며 버스에 오르는 여자처럼, 우리는 한때 방 안의 의식에 그쳤던 행위들이 거리를 수놓는 시대에 살고 있다.


꽁꽁 감춰야만 했던 신체의 곡선이 패션으로 거듭나는 순간, 속옷은 새로운 담론으로 진화한다. 남성의 속옷이 스트리트 패션의 정수로 자리 잡았듯, 여성의 속옷 또한 하나의 메시지가 된 셈이다. 속옷이 훤히 드러나는 남자 아이돌의 새깅은 쿨하지만, 레더 재킷과 부츠까지 더한 여배우의 슬립 드레스 룩은 과하다는 주장에 타당한 근거는 없어 보인다. 우리는 과연 언제, 어디서 속옷을 드러내도 괜찮을까? 그리고 대체 누가 그것을 불편해할까?


“도전하는 걸 좋아해요.” 그의 파격적인 언더웨어 룩을 둘러싼 말들에 문가영은 짧은 대답으로 응수했다. 모두가 그를 두고 손쉽게 ‘얌전하다’고 말할 때 문가영은 가만히 웃는다. 물리학자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며 책을 쓰고, 언니와 독일어로 편지를 주고받는 지적인 얼굴 뒤엔 늘 변칙을 꿈꾸는 욕망이 숨어있다. 그 조용한 눈빛에 깃든 불온한 열정은 돌체앤가바나의 관능적인 슬립 드레스처럼 짙고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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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박지우
  • 사진 IMAXtree ∙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