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무지 티셔츠는 좀처럼 말이 없다

알고리즘을 떠들썩하게 만든 패션에 관해 이야기하는 <마이 아이콘>, 다섯 번째 주인공은 홍진경의 시끄러운 무지 티셔츠.

프로필 by 박지우 2025.09.05

티셔츠의 세계는 실로 복잡하다. 물론 대충 고를 수도 있다. 하지만 매일 피부에 닿는 만큼 가장 으뜸인 걸 고르는 편이 현명하다. 그런 점에서 티셔츠는 쌀밥과 무척 닮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챙겨 먹는 끼니처럼, 티셔츠는 가장 쉽고 정직하게 나를 돌보는 방식이다. 화려한 럭셔리 라이프를 즐기기로 정평이 난 모 패션 유튜버는 이렇게 말했다. “제게 진정한 명품은 이 티셔츠예요.” 며칠 뒤 다른 유튜버는 불평했다. “아무리 명품이라도 티셔츠는 다 거기서 거기예요.” 남자는 다 똑같다는 말처럼 정말 티셔츠도 그럴까?


@jinkyunghong

@jinkyunghong

오래전부터 홍진경의 SNS에는 먹색 티셔츠가 수없이 등장한다. 기장이나 디테일이 조금씩 달라질 뿐, 자연스럽게 빛바랜 티셔츠는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뉴욕에서도, 딸과의 드라이브에서도 함께했던 티셔츠의 정체는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제임스 펄스’다. 그는 “다른 면 티셔츠는 못 입겠다”며 브랜드를 향해 각별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임스 펄스는 슬러브 코튼과 슈렁큰 기법으로 완성한 특유의 자연스러운 실루엣과 로고리스 디자인으로 탄탄한 팬층을 구축했다.


James Perse

James Perse

American Vintage

American Vintage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티셔츠 한 장에 몇십만 원을 지불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제임스 펄스는 2000년대를 휩쓴 인디 슬리즈 열풍을 타고 오늘날 틱톡 세대에까지 불시착했다. 요란한 프린팅이나 자로 잰 듯 말끔한 마감은 언젠가부터 멋없다. 텅 빈 도화지 같은 무지 몸판에 얼룩덜룩한 가먼트 워싱, 거친 거즈 이펙트야말로 살아 있는 옷의 증거다. 기본에 충실한 만듦새로 정평이 난 프랑스 마르세유 기반 브랜드 ‘아메리칸 빈티지’ 매장에 들어서면 무수한 흰 티셔츠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언뜻 같아 보여도 넥라인, 소재, 기장, 마감이 천차만별이다. 이 두 개가 어떻게 다른 티셔츠라는 건지 가까이 들여다보고 만져보아야 겨우 납득할 정도다. 면 100%의 깔끔한 티셔츠부터 브러시드 이펙트로 거칠게 마감한 티셔츠까지, 무지 티셔츠의 세계는 이토록 방대하다.


홍진경의 오래된 먹색 티셔츠는 소란스럽지 않은 그의 태도와도 닮았다. 그는 이미 자기 자신으로도 충만하기에 굳이 시끄러운 티셔츠로 자신을 한 번 더 증명할 필요가 없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우스꽝스러운 분장으로 기어이 남들을 웃겨버리고야 말 때, 나는 스크린 너머로 괜스레 그의 눈치를 본다. 그가 얼마나 유약한 감수성과 단단한 단어를 가진 사람인지 알기에 주제넘지만 그를 걱정해 본다. 소박한 식습관부터 무심히 고른 듯하지만 깊은 맛을 내는 그릇 취향까지, 무지 티셔츠가 사람이 된다면 아마 홍진경일 테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그의 담백한 글도 먹색 티셔츠와 지독히 닮았다. “소박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살아도 초라해지는 건 싫다.”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한 시대를 풍미하던 그 시절, 담담한 필치로 써 내려간 그의 글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몸과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질 때마다 나는 그의 글을 조용히 꺼내 읽는다. 20년도 넘은 미니홈피 속 소박한 글이 세대를 넘어 지금의 20대에게 닿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한때 화려한 슈퍼 모델로 패션계를 누비던 그는 시간이 흘러 이제 무지 티셔츠를 입는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무지 티셔츠 같은 공백에 목말라 있는지도 모른다.


Hailey Bieber

Hailey Bieber

Victoria Beckham

Victoria Beckham

어느덧 주류로 거듭난 덜어냄의 미학을 좇을 요량으로 깨끗한 흰색 제임스 펄스 티셔츠를 장만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저급한 도파민에 절여진 현대인 탓일까? 티셔츠도 주인을 닮아 덩달아 말이 많아졌다. 기어코 티셔츠에도 자아가 생긴 셈이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로고로, 누군가는 슬로건으로 손쉽게 확성기를 켠다. 헤일리 비버는 금수저 2세 논란에 ‘Nepo Baby’ 티셔츠로 응수했고, 빅토리아 베컴은 카메라 앞에서 도통 웃지 않는다는 비난을 ‘Fashion Stole My Smile’ 티셔츠로 보기 좋게 맞받아쳤다.


시끌벅적해진 거리 위를 달랑 무지 티셔츠만 걸친 채 거닌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적어도 당신이 패션 피플이라면 말이다. 티셔츠 애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백 장에 이르는 방대한 아카이브 사이에서도 무지 티셔츠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무’는 말이 없는 법이다. 조용히 여백의 무게를 견딘다. 매일 아침 옷을 고를 때면 내 심심한 맨얼굴을 닮은 무지 티셔츠는 늘 화려한 티셔츠에 맥없이 지고 만다. 무지 티셔츠는 오직 내가 나로 충분할 때만 선택할 수 있는 사치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건 무지 티셔츠일지 모른다. 그 침묵이 모든 걸 드러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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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박지우
  • 사진 GettyImages ∙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