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걸은 어떻게 패션이 됐을까?
알고리즘을 떠들썩하게 만든 패션에 관해 이야기하는 <마이 아이콘>, 네 번째 주인공은 비로소 패션으로 거듭난 아이돌 팬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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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쏘리와 제니 팍스의 협업 컬렉션.
얼마 전 페트라 콜린스는 자기만의 방을 서울 한복판에 번쩍 들어다 옮겨뒀다. 교복 아래 체육복을 받쳐 입은 소녀, 벽을 빼곡히 메운 동경하는 이의 포스터와 잡동사니, 라이터와 일탈까지,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아이돌이라는 이름의 신화적 존재가 서 있었다. 이번 팝업스토어는 그가 전개하는 브랜드 아임 쏘리와 제니 팍스의 발칙하고도 사랑스러운 협업 컬렉션 발매 이벤트의 일환이었다. 페트라 콜린스의 렌즈는 열정적인 팬걸의 순간에 소녀의 내밀한 감정을 절묘히 굴절시켜 독특한 상을 자아냈다.

더블렛 2025 S/S 컬렉션 'IDOL'.

도쿄 이세탄 신주쿠점에서 열린 더블렛 2025 S/S 컬렉션 팝업 스토어.
그런가 하면 더블렛은 아이돌 문화의 상징을 패션 언어로 번역하는 데 성공했다. 이노 마사유키는 AI로 제작한 포토카드와 응원봉, 팬미팅용 피켓을 매단 재킷을 통해 팬덤이 얼마나 어엿하게 패션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 증명했다. 히스테릭하고 미성숙한 것으로 평가절하되던 팬덤 문화가 이제는 디자이너들의 영감으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하게 된 셈이다.
아이돌이 비로소 패션으로 거듭나는 순간은 언제일까? 정답은 필릭스가 루이 비통 런웨이에 설 때도, 블랙핑크가 코첼라 무대에 오를 때도 아니다. 질문이 향해야 할 곳은 따로 있다. 과연 그동안 우리는 스스로 K-팝을 패션으로 인정하려고나 했을까?

루이 비통 2025 F/W 컬렉션 런웨이에 등장한 스트레이 키즈 필릭스.
지금 K-팝 아이돌의 동의어는 패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션 하우스가 새로운 아이돌 멤버를 앰배서더로 발탁했다는 소식은 하루가 멀다고 온갖 매체에 대서특필된다. 매 시즌 패션위크의 프런트 로를 꿰찬 K-팝 아이돌 소식은 그야말로 나노 단위로 소비된다. 공항 패션부터 무자비한 플래시 세례 속에서 피어난 게티 이미지, 스케줄을 마친 후 유럽 거리에서의 망중한까지, 우리는 어쩌면 이들의 얼굴을 가족보다도 더 자주 들여다보게 됐는지도 모른다. 아이돌의 패션위크 행차 소식은 디자이너의 런웨이에 맞먹을 정도의 메인 이벤트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지점이 있다. 여기에서 주체는 과연 어느 쪽일까? K-팝 아이돌은 연일 패션 하우스의 얼굴을 갈아치우고 있지만, 정작 이들의 스타일 자체가 진정한 패션의 한 축으로 논의된 적은 거의 없다. 서구 패션계는 물론, 한국인들조차 그동안 아이러니하게도 K-팝을 진정한 주류 문화로 인정하지 않았던 셈이다. 패션 하우스의 앰배서더 발탁 소식, 빌보드 차트 진입, 그래미 노미네이션처럼 오로지 외부의 인정을 통해서만 K-팝의 가치를 확인받으려 했던 일종의 문화적 콤플렉스 탓이다.

@kiiikiii.official
하지만 지금 K-팝 스타일은 조악한 코스튬 플레이 취급을 받던 시절로부터 너무나 먼 길을 와버렸다. 가령 지난 2012년, 유튜브 조회 수 50억회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촌스러운 한국식 키치로 힐난 받던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떠올려 보자.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등장과 동시에 아이돌계 정반합의 상징이 된 뉴진스의 말간 얼굴과 키키의 초현실주의적인 비주얼을 상상해 보자. K-팝의 미적 성숙도는 어떤 반열에 올랐다(미감이라는 납작한 단어로 이 주장을 망치고 싶진 않다).
후지와라 히로시와 무라카미 다카시가 러브콜을 보내고 제이미 마리 쉽튼이 인스타그램 비주얼 디렉팅을 맡는 지금, 어느 누가 K-팝에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것도 서구의 팝 문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욱여넣는 게 아닌, 헤어부터 메이크업, 스타일링까지 네오-한국적인 미학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말이다. 이는 K-팝이 단순한 시각적 완성도를 넘어 문화적 자신감까지 획득했다는 증거다. 자기 확신이야말로 K-팝이 비로소 패션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다. 페트라 콜린스와 이노 마사유키가 감지한 것 역시 K-팝에 불어온 자기 확신이라는 분명하고 새로운 바람 아닐까? 진정한 문화적 승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법이다.
Credit
- 글 박지우
- 사진 IMAXtree ∙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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