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팬걸은 어떻게 패션이 됐을까?

알고리즘을 떠들썩하게 만든 패션에 관해 이야기하는 <마이 아이콘>, 네 번째 주인공은 비로소 패션으로 거듭난 아이돌 팬덤 문화.

프로필 by 박지우 2025.04.04
아임 쏘리와 제니 팍스의 협업 컬렉션.

아임 쏘리와 제니 팍스의 협업 컬렉션.

얼마 전 페트라 콜린스는 자기만의 방을 서울 한복판에 번쩍 들어다 옮겨뒀다. 교복 아래 체육복을 받쳐 입은 소녀, 벽을 빼곡히 메운 동경하는 이의 포스터와 잡동사니, 라이터와 일탈까지,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아이돌이라는 이름의 신화적 존재가 서 있었다. 이번 팝업스토어는 그가 전개하는 브랜드 아임 쏘리제니 팍스의 발칙하고도 사랑스러운 협업 컬렉션 발매 이벤트의 일환이었다. 페트라 콜린스의 렌즈는 열정적인 팬걸의 순간에 소녀의 내밀한 감정을 절묘히 굴절시켜 독특한 상을 자아냈다.


더블렛 2025 S/S 컬렉션 'IDOL'.

더블렛 2025 S/S 컬렉션 'IDOL'.

도쿄 이세탄 신주쿠점에서 열린 더블렛 2025 S/S 컬렉션 팝업 스토어.

도쿄 이세탄 신주쿠점에서 열린 더블렛 2025 S/S 컬렉션 팝업 스토어.

그런가 하면 더블렛은 아이돌 문화의 상징을 패션 언어로 번역하는 데 성공했다. 이노 마사유키는 AI로 제작한 포토카드와 응원봉, 팬미팅용 피켓을 매단 재킷을 통해 팬덤이 얼마나 어엿하게 패션으로 진화할 수 있는지 증명했다. 히스테릭하고 미성숙한 것으로 평가절하되던 팬덤 문화가 이제는 디자이너들의 영감으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하게 된 셈이다.


아이돌이 비로소 패션으로 거듭나는 순간은 언제일까? 정답은 필릭스가 루이 비통 런웨이에 설 때도, 블랙핑크가 코첼라 무대에 오를 때도 아니다. 질문이 향해야 할 곳은 따로 있다. 과연 그동안 우리는 스스로 K-팝을 패션으로 인정하려고나 했을까?


루이 비통 2025 F/W 컬렉션 런웨이에 등장한 스트레이 키즈 필릭스.

루이 비통 2025 F/W 컬렉션 런웨이에 등장한 스트레이 키즈 필릭스.

지금 K-팝 아이돌의 동의어는 패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션 하우스가 새로운 아이돌 멤버를 앰배서더로 발탁했다는 소식은 하루가 멀다고 온갖 매체에 대서특필된다. 매 시즌 패션위크의 프런트 로를 꿰찬 K-팝 아이돌 소식은 그야말로 나노 단위로 소비된다. 공항 패션부터 무자비한 플래시 세례 속에서 피어난 게티 이미지, 스케줄을 마친 후 유럽 거리에서의 망중한까지, 우리는 어쩌면 이들의 얼굴을 가족보다도 더 자주 들여다보게 됐는지도 모른다. 아이돌의 패션위크 행차 소식은 디자이너의 런웨이에 맞먹을 정도의 메인 이벤트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한 지점이 있다. 여기에서 주체는 과연 어느 쪽일까? K-팝 아이돌은 연일 패션 하우스의 얼굴을 갈아치우고 있지만, 정작 이들의 스타일 자체가 진정한 패션의 한 축으로 논의된 적은 거의 없다. 서구 패션계는 물론, 한국인들조차 그동안 아이러니하게도 K-팝을 진정한 주류 문화로 인정하지 않았던 셈이다. 패션 하우스의 앰배서더 발탁 소식, 빌보드 차트 진입, 그래미 노미네이션처럼 오로지 외부의 인정을 통해서만 K-팝의 가치를 확인받으려 했던 일종의 문화적 콤플렉스 탓이다.


@kiiikiii.official

@kiiikiii.official

하지만 지금 K-팝 스타일은 조악한 코스튬 플레이 취급을 받던 시절로부터 너무나 먼 길을 와버렸다. 가령 지난 2012년, 유튜브 조회 수 50억회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촌스러운 한국식 키치로 힐난 받던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떠올려 보자.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등장과 동시에 아이돌계 정반합의 상징이 된 뉴진스의 말간 얼굴과 키키의 초현실주의적인 비주얼을 상상해 보자. K-팝의 미적 성숙도는 어떤 반열에 올랐다(미감이라는 납작한 단어로 이 주장을 망치고 싶진 않다).


후지와라 히로시와 무라카미 다카시가 러브콜을 보내고 제이미 마리 쉽튼이 인스타그램 비주얼 디렉팅을 맡는 지금, 어느 누가 K-팝에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것도 서구의 팝 문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욱여넣는 게 아닌, 헤어부터 메이크업, 스타일링까지 네오-한국적인 미학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말이다. 이는 K-팝이 단순한 시각적 완성도를 넘어 문화적 자신감까지 획득했다는 증거다. 자기 확신이야말로 K-팝이 비로소 패션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다. 페트라 콜린스와 이노 마사유키가 감지한 것 역시 K-팝에 불어온 자기 확신이라는 분명하고 새로운 바람 아닐까? 진정한 문화적 승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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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박지우
  • 사진 IMAXtree ∙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