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교수가 30년 넘게 사용한 명품 보온병
산업디자인학고 교수 김성곤의 오랜 벗, EM-77 보온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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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77 보온병
」34년 전, 이화여대 앞의 한 카페에서 처음 만난 보온병이 있다. 덴마크 스텔톤(Stelton)사의 EM-77. 흰색의 단아한 원기둥 형태에 새의 눈과 부리를 연상시키는 구조는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 따뜻한 커피가 그 안에 담겨 있는 모습은 무엇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EM-77 보온병은 꼭 갖고 싶은 물건이 됐다.
런던 유학 시절에 처음 구입해 사용할 때 내부가 유리로 돼 있어 충격에 약했고, 가격도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용도를 야외가 아닌 실내용으로 정하고, 커피 대신 따뜻한 보리차를 담았다. 여름엔 시원한 보리차, 겨울엔 따뜻한 보리차. 그렇게 스텔톤사의 EM-77 보온병은 하루를 여는 가장 익숙한 도구가 됐다. 이제는 연구실에 출근하면 가장 먼저 보리차를 끓인다. 그리고 그 보리차는 어김없이 EM-77에 담긴다. 이 보온병은 나와 함께 연구실을 지키며, 학생들과 나누는 따뜻한 차 한 잔의 기억 속에도 존재한다. 어느 날 30년 넘게 사용한 보온병의 내부 유리가 깨진 걸 발견했다. 오래된 만큼 이젠 보내줄 때가 됐구나 싶었지만, 외형은 여전히 멀쩡했다. 잠시 연구실 한쪽에 뒀다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내부 유리병만 따로 판매하는 걸 알았다. 기쁜 마음으로 유리병을 교체했고, EM-77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이것이야말로 롱라이프 디자인(Long-life Design) 아닐까?
나는 물건을 좋아한다. 특히 디자이너가 개입돼 잘 만들어진 공산품, 대량생산 제품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적절한 가격과 균질한 품질,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유용함.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기술, 자본과 자원이 집약돼 있다. 200여 년 전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대량생산은 초기에는 제품이 조악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술이 발전하고 디자이너가 개입하면서 장인 못지않은 품질과 미적 가치를 갖추게 됐다. 처음에는 미술가들이 그 역할을 했지만, 점차 전문 디자이너의 필요성이 대두되며 ‘디자인’이라는 분야와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생겨났다. 나는 공예품처럼 한정판이거나 과도한 마케팅에 의존한 제품보다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아름답고 실용적인 공산품을 좋아한다. 특정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한 제품에는 마음을 주지 않는다. 그런 제품은 담백함이 빠져 있고, 물건 자체보다 이야기가 과잉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나처럼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에게 어떤 물건은 종종 단순한 소비재를 넘어 오랜 시간 함께한 특별한 의미가 된다. 내 주변엔 그런 물건이 꽤 있다. 오랫동안 쓰이고, 지금도 쓰이고, 앞으로도 계속 쓰일 수 있는 물건. 시대가 변해도 가치를 잃지 않는, 디자인이 잘된 물건. 그런 디자인을 좋아하다 보니 어느덧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관련 전시를 열 정도로 관심과 애정이 깊어졌다.
올해 4월, 덴마크 코펜하겐의 디자인 박물관을 방문했다. 내가 좋아하는 유럽의 디자인 박물관은 많다. 런던의 디자인 뮤지엄, 바젤의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뮌헨의 피나코텍, 밀란의 트리엔날레 등. 그중에서도 코펜하겐 디자인 박물관은 ‘데니시 모던(Danish Modern)’의 중심이라 더욱 특별하다. 그곳 전시의 중심에는 에릭 마그누센(Erik Magnussen)이 디자인한 스텔톤사의 EM-77 보온병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도 30년 전 내가 코펜하겐에서 두 번째로 구매했던 바로 그 파란색 버전이었다. 주둥이 부분이 지금보다 약간 투박했구나. 첫 번째는 앞서 이야기했던 하얀색을 런던에서 구입했으며, 지금도 내부 유리병을 교체해 가며 잘 사용하고 있다. 스텔톤사의 EM-77 보온병은 단지 커피나 차를 담는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내 디자인 일상, 연구실의 디자인 공기, 제자들과의 디자인 기억 그리고 디자인 철학이 담긴 시간의 그릇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계속 존재할 수 있는 물건. 그것이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물건이며, 내가 지향하는 디자인의 모습이다. 고맙다, 나의 오랜 벗, EM-77 보온병.
김성곤
서울시립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대량생산 제품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글 김성곤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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