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리에 만즈의 이토록 우아한 일상 디자인
세실리에 만즈의 도구는 일상을 부드럽게 바꾸는 힘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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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에 만즈. 책상 위에는 베오사운드 A1 리미티드 에디션 ‘듄(Dune)’의 컬러 그러데이션을 위한 드로잉이 놓여 있다. 덴마크 서해안의 모래언덕과 바다에서 영감을 받아 자연 속에서 은은하게 변하는 색조를 알루미늄 표면에 그러데이션으로 구현했다.
1999년, 덴마크의 한 젊은 디자이너가 벽에 기대 선 사다리를 디자인했다. 누군가는 ‘이게 디자인이야?’라고 반문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세 번째 단의 폭이 걸터앉을 정도로 살짝 넓은 그것은 분명히 사다리지만 동시에 의자이기도 했다. ‘더 래더(The Ladder)’는 서가에서 책을 꺼내 그대로 앉아 읽을 수 있도록 고안한 오브제다. 독일의 닐스 홀거 무어만(Nils Holger Moormann)은 잡지에 실린 이 프로토타입을 보고 단번에 상품화를 결정했다. ‘세실리에 만즈’라는 이름이 조용히 수면 위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이후 프리츠한센과 뱅앤올룹슨을 비롯한 브랜드와 협업하면서 세실리에 만즈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대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만즈가 만든 단순하고 절제된 형태의 사물에는 늘 ‘필요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기능’이 구현돼 있다. 그녀의 디자인이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미묘한 차이가 만드는 깊이 때문이다. 만즈의 사물은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넨다. 그것이 조약돌처럼 손에 감기는 스피커든, 부드럽게 접히는 목재 파티션이든, 겹겹이 쌓이는 그릇이든. 각각의 사물이 보내는 나지막한 속삭임에는 일상을 부드럽게 바꾸는 힘이 있다.

2018년 핀란드 브랜드 니카리(Nikari)를 위해 디자인한 파티션 ‘세파랏(Separat)’ 스케치.

사다리이자 의자로 활용 가능한 다목적 가구 ‘더 래더’.
매일 손에 닿고 자연스럽게 삶에 스며드는 사물을 아름답게 디자인해 왔습니다. 당신에게 일상 도구란 어떤 의미인가요
일상 도구는 당신을 돕는 존재예요. 실용적 차원뿐 아니라 감정적 차원에서도 그렇죠. 매일 사용하는 물건에도 깊은 애착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얻었는지, 누가 줬는지, 어디서 발견했는지 등의 이야기가 담기면서요. 물건을 볼 때 어떤 사람은 기능만 중시합니다. 가령 숟가락은 숟가락 역할만 잘하면 된다는 식이죠. 또 어떤 사람은 그 물건이 어떻게 생겼는지, 왜 그런 디자인인지 주목하고요. 한발 나아가 물건에 얽힌 이야기, 문화적 가치와 전통, 연상되는 이미지 같은 비물질적 가치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 유형인 것 같아요.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고 보여지며, 어떤 정서적 영향을 주는지 탐구하는 건 제게 무척 중요합니다.

은은한 결의 목재에 가죽 힌지를 더해 부드럽게 접히고 펼쳐지는 세파랏은 정갈한 형태로 공간을 자연스럽게 구획한다.
스튜디오 곳곳 아름다운 스케치가 눈에 띕니다. 당신의 디자인은 늘 드로잉에서 시작된다고요
드로잉은 제게 중요한 출발점이에요. 의사소통 방식이자 길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고요. 하얀 종이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본 적 없어요. 그냥 언제나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하죠. 때론 머릿속에서 드로잉이 시작돼 종이로 옮겨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초기 드로잉은 무척 중요해서 꼭 보관하곤 합니다. 설령 아주 엉성한 낙서일지라도 프로젝트의 본질을 담고 있거든요. 몇 달 뒤 길을 잃었을 때 다시 보면 그 드로잉 속의 ‘감정’이 저를 도와줍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수많은 우회로와 다양한 의견이 얽히기에 처음의 생각과 의도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을 감싸는 셸 구조에 곡선형 합판과 패브릭, 가죽 디테일을 더한 프리츠한센의 ‘모놀릿™’ 다이닝 체어.

함께 앉은 사람들과 ‘하나 되는 느낌’을 주는 둥근 테이블과 곡선 등받이의 의자로 구성된 마루니 ‘EN 컬렉션’.
디자이너가 된 데는 도예가였던 부모님의 영향도 있었다죠
예술적이고 장인 정신이 깃든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모든 것을 ‘거저 얻는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결국 스스로 노력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부모님과 조금 다른 길을 가고 싶어 가구 디자인을 공부한 것 같습니다. 제가 집에서 배운 건 디자인에 대한 가치관과 미적 감각, 헌신과 열정의 중요성이었어요. 자기만의 언어를 찾기 위해선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건 언제나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물의 기능을 깊이 이해하는 것. 그 지점에서 진짜 디자인이 시작돼요.

염색하지 않은 천연 베이비 알파카 울에 섬세한 테두리 스트라이프와 고유한 짜임새를 지닌 엘방 덴마크(Elvang Denmark) ‘에크루(Écru) 컬렉션’.
세실리에 만즈의 디자인은 겸손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로 조용히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소재 본연의 무드를 강조하는 텍스처와 컬러는 볼수록 깊은 감성을 전달하죠. 단순한 형태 속에 그토록 풍부한 감각을 담는 비결은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작업하다 보면 사물의 기능을 깊이 이해하는 단계 속에서 어떤 디테일을 유지하고 강조할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긴 여정이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죠. 단순함이란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것은 정제된 결과물입니다.
당신이 만든 사물은 다분히 기능적입니다. 제품의 역할과 성품이 담백하게 드러나 있죠. 여태껏 디자인한 사물 중 당신에게 특히 유용한 것은
1616 아리타 재팬(1616/Arita Japan)과 제작한 ‘CMA 클레이(CMA Clay)’를 집에서 매일 사용하고 있어요. 어떤 요리에도 잘 어울리도록 디자인했기 때문에 직접 쓰면서 범용성을 더욱 실감하고 있죠.

어떤 요리에도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디자인에 쌓을 수 있는 구조로 실용성을 높인 1616 아리타 재팬 ‘CMA 클레이 컬렉션’.
클라이언트가 있는 일반 프로젝트와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프리 휠(Free Wheels)’ 프로젝트가 스튜디오 운영의 주축이라고요
둘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요. 제게 프리 휠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탐구하는 공간이에요. 그 안에서 저는 마음껏 꿈을 꿉니다. 올해 ‘스리데이즈오브디자인(3Daysofdesign)’ 때 <피치 코너Peach Corner> 전시의 일환으로 선보인 ‘샴페인(Champagne)’ 시리즈가 그랬습니다. 부모님의 도예 작업장에서 샌드캐스트 방식이라는 고전적 기법으로 제가 직접 만든 오브제와 함께 1616 아리타 재팬과 개발 중인 포슬린 컵 프로토타입을 전시했죠. 실패와 좌절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발견으로 이어졌습니다.
세실리에 만즈의 디자인 여정에서 뱅앤올룹슨(이하 B&O)과의 협업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당신이 디자인한 블루투스 스피커는 오디오 디자인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2010년 시작된 B&O과의 협업은 제게 큰 모험이었어요. 오디오 제품을 디자인해 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하지만 제 커리어 초반부터 늘 그래왔듯 ‘이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면 경험이 없어도 과감히 도전하는 편이에요. 낯선 영역에 뛰어드는 걸 두려워하지 않죠. 흰 종이를 마주했을 때처럼요. 일단 한쪽 끝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자료를 조사하고, 리서치하고, 모형을 만들고, 감각을 총동원하는 식으로요. 가구든 식기든 전자 제품이든 작업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기능성과 절제, 미학을 중심에 두고 드로잉, 모델링, 테스트를 반복합니다. 스마트폰을 올려두거나 충전할 수 있는 박스형 스피커 ‘베오릿 12(Beolit 12)’를 시작으로 조약돌을 닮은 컴팩트한 ‘베오사운드 A1(Beosound A1)’ 등 다양한 제품을 디자인했어요. 당시 B&O은 더 매력적이고, 가격 접근성이 좋은 제품이 필요했습니다. 그 전환점을 여는 시리즈를 함께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제품으로 남았다는 게 무척 기쁘죠.

2024년 밀란 트리엔날레 전시 <Walking Sticks & Canes>를 위해 선보인 지팡이 ‘스토크(Stok)’. ‘나이 들었을 때 쓰고 싶은 지팡이’라는 주제에 따라 얇은 알루미늄 몸체에 T자 손잡이, 구멍으로 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지팡이를 디자인했다.
그간 디자인한 제품 중 개인적으로 ‘좋은 도구’라고 느낀 것이 있다면
2009년 프리츠한센을 위해 디자인한 ‘에세이(Essay)’ 테이블이 출시 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어요. 밥을 먹든, 일을 하든 모든 순간을 함께하죠. 이 테이블은 하단에 가림대(Apron)가 없고 목재의 품질과 내구성이 뛰어납니다. 가끔 비누로 가볍게 닦아주면 금방 새것처럼 되죠. 우리 집의 진정한 ‘일꾼’이에요(웃. 멋진 사용 흔적(파티나)을 남기면서 손질 가능하다는 점이 좋습니다 .이야말로 지속 가능성의 본질 아닐까요?

스웨덴 러그 브랜드 카스탈(Kasthall)과 협업한 ‘란스카브(Landskab)’. 고요한 들판을 연상케 하는 다양한 질감과 색상 옵션으로 공간과 쉽게 조화를 이루는 컬렉션을 완성했다.
물건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사물을 디자인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그럼에도 당신이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 이유는
가끔 이 일을 하면서 죄책감도 들어요. 새로운 걸 또 만들어야 하나, 스스로 묻기도 하고요. 하지만 ‘좋은 디자인’을 만들겠다는 기준만큼은 늘 지켜왔어요. 디자인은 더 나아야 하고, 더 의미 있어야 하며, 좋은 품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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