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도 스펙터클도 없는 '소주전쟁'이 강조한 영화적 경험
일과 삶, 전체와 개인, 정의와 불의를 바라보는 관객의 가치관을 묻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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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닥에는 영원한 친구도, 원수도 없어."
영화 <타짜>의 명대사입니다. 극 중에서 '이 바닥'이란 도박판이었지만, 사실 어느 바닥(?)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죠. 영화 <소주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품은 IMF 외환위기 당시 자금난에 휘청이던 국내 대기업, 그리고 이를 헐값에 사서 비싸게 팔려던 외국 자본의 '전쟁'을 그리는데요. 조 단위의 돈이 걸려 있다 보니, 상황이 언제나 정의롭게 흘러가지만은 않아요. <소주전쟁> 속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는 친구가 됐다가 금세 원수 사이가 되기를 반복합니다.

실제로 외환위기 때 여러 국내 기업들이 비슷한 원인과 과정을 통해 속절 없이 쓰러지거나 팔려 나갔습니다. 그 중에서도 <소주전쟁>이 선택한 건 진로와 골드만삭스 이야기입니다. 작품에서는 양측이 각각 국보그룹과 솔퀸으로 나와요. 현대사가 스포일러인 영화라 결말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마지막까지 극을 견인하는 방법입니다.
언급했듯 <소주전쟁>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투는 이들이 서로를 믿고 배신하기를 되풀이하는 내용이에요. 건조한 법정 공방 대신 거기까지 가는 축축한 물밑 과정에 집중합니다. 여기서 국보그룹 재무이사 종록(유해진)과 솔퀸 직원 인범(이제훈)의 가치관이 극단적으로 충돌해요. 종록이 '지키려는 자'고, 인범이 '빼앗으려는 자'입니다.

사람 잘 믿고 정 많은 종록은 개인도 가족도 포기한 채 회사와 오너에게 충성하는 인물입니다. 반면 '사람이 돈을 이길 수 없다'고 믿는 엘리트 인범은 자신의 성과와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처세하죠. 표면적으로는 두 사람의 지향점이 정 반대로 보입니다. 종록의 행복은 회사의 행복이고, 인범의 행복은 스스로의 행복이니까요. 종록이 내내 이렇다 할 반격도 못한 채 이쪽저쪽에서 두드려 맞다 보니, 결국 인범의 가치관이 현실적으로 옳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소주전쟁>의 관람 포인트가 여기 있습니다. 일과 그 외의 삶, 그리고 자신을 지탱하는 가치관에 대해 매우 다각도로 고찰해 볼 수 있게 하는 거예요.

<소주전쟁>에는 현란한 액션도 화려한 스펙터클도 없습니다. 지금의 관객들은 이 같은 요소들을 가진 영화가 있더라도 극장 가기를 망설입니다. 바꿔 말하면 특별한 비주얼이나 사운드가 극장 관람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는 소리죠. 그런 관점에서 <소주전쟁>은 불리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좀 다른 영화적 경험을 제안합니다. 극장에서 주변 방해 없이 오로지 스크린만 마주한 관객이 영화에 몰입했을 때 나오는 사색의 경험이 그것입니다. 빨리감기도 없고, 화면에 휴대폰 알람이 뜨지도 않고, 스크린 외의 사위가 고요해진 공간에서 관객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보고 듣는 행위와 생각 뿐일테니까요. 여기서 나아가 같은 경험을 했거나 그렇지 않은 누군가와 사색의 내용을 공유하기도 좋겠고요.

이를 두고 종록 캐릭터를 연기한 유해진은 29일 언론시사회가 끝난 뒤 "<소주전쟁>은 보고 나서 생각할 부분이 많은 영화다. 관객들이 '오락 영화 잘 봤다'고 평하지는 않을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주전쟁>을 '약간의 숙취가 있는 영화'라고 표현했어요. 극장을 빠져나올 때 상쾌하고 개운하지는 않겠지만, 조금 머리가 욱신거리더라도 영화가 제시한 생각의 퍼즐들을 맞춰 볼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뜻으로 들려요. 인범 역의 이제훈도 "<소주전쟁>이 관객들에게 함축적으로 질문을 많이 던진다. 일과 삶 사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지, 영화를 보고 토론해 보면 어떨까 싶다"라고 했습니다. 더불어 영화의 빌런(?) 격인 석진우 역의 손현주는 "<소주전쟁>이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 술 대신 말을 많이 먹을 수 있는 영화"라며 관람 후 토론을 독려하기도 했네요. 영화는 30일 개봉합니다.
Credit
- 에디터 라효진
- 사진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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