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훈에게 영화 '소주전쟁'은 "아주 훌륭한 안줏거리"
흐르는 땀줄기를 '슥' 닦아내고 다시. 숨 고를 틈 없는 이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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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가 있는 술자리는 흔히 전쟁터로 비유되죠. 그 전쟁에서 최대한 살아남은 기억은 언제인가요
와, 기억이 안 나요. 살아남는다…. 소주로 살아남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죠(웃음)? 다음 날 숙취 걱정 없는 애주가라면 그 전쟁을 즐기겠죠.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날 속이 쓰리고 두통에 시달린다면 그저 그 자리를 즐기는 게 중요합니다.
숙취가 심한 편이군요
굉장합니다. 숙취 때문에 두통이 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께 다시는 안 마실 테니 한 번만 봐달라고 빌어요.

5월 30일 개봉을 앞둔 <소주전쟁>을 촬영할 때는 음주를 잘 안 했다고요. 소주와 전쟁, 두 단어가 풍기는 날카로운 느낌 때문인지 박진감과 긴장감이 넘칠 것 같아요
빨리 보여드려야 하는데! 이런 소재의 드라마가 한국에서 귀해 기대가 큽니다. 전작 <탈주>와는 또 다른 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997년 IMF를 겪어보지 못한 젊은 세대는 영화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거예요.
이 작품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 건가요
아주 훌륭한 안줏거리?
시나리오를 읽으며 가장 ‘소주 맛’을 강하게 느꼈던 지점은
‘최인범’은 목적이 분명한 인물이에요. 그가 속한 글로벌 투자회사의 궁극적 목표인 수익 창출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성취해야 승자라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위기의 소주 회사를 삼키려는 목적으로 한국에 왔는데, 소주 회사의 재무이사이자 안방마님 같은 존재인 ‘표종록’과 만나면서 점점 감정과 생각, 판단이 달라지는 게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그래서 <소주전쟁> 감상 후 소주를 마시며 안줏거리 삼아 영화에 대한 토론을 해보시길 추천합니다!
돈 많이 벌면 최고라는 가치관으로 삶을 살며 성과만 추구하는 인범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가요
그렇죠. 일은 일, 개인사는 개인사라며 철저하게 나눠 생각하니까. 반면 유해진 선배님이 연기한 종록은 정반대 성향이에요. 회사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인범의 냉철한 면모를 답답해하죠. 종록의 애사심과 진심을 보며 인범은 자신의 삶을 돌아봐요. 직장인들은 두 사람의 상반된 회사생활에 아주 공감하실 겁니다.

블루 스톤 메시 톱은 Kenzo. 베이지 와이드 팬츠는 Acne Studios. 하트 패턴의 타이는 Vivienne Westwood. 화이트 시스루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인범은 ‘야망캐’ 그 자체군요
예고편에서 인범이가 이렇게 말해요. “대한민국은 돈 벌 자유가 있는 나라 아니냐”고. 맞는 말이지만 과연 모든 가치를 누르면서 으뜸이 될 수 있는 명제인지 생각했을 때 다들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 스스로 양심적이고 올바른 사람이라서 이득을 쟁취하는 건 잘못됐다는 생각 때문에 당장의 이득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어떤 딜레마 속에서 겉으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지만, 속으로는 그런 건 차치하고 진짜 내 손에 쥐어지는 물질적인 게 많으면 사람들은 쉽게 무언가를 선택하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저는 한 것 같아요. 이 작품을 통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이번 작품을 연기하며 쾌감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유해진 선배와 합을 맞출 때. 보통 촬영에 앞서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대사의 흐름대로 연기가 되겠다는 걸 예상하는데요. 선배님과 할 때는 연기에 조금 다른 형식으로 접근했어요. 대사와 대사 사이에 제스처나 섬세한 행동으로 둘의 관계를 여러 층으로 보이게끔 해주셨어요. 헤어지는 장면에서 제가 선배님 어깨를 툭 치고 돌아서 가는데 선배님이 뒤쫓아와서 제 등을 툭 때리며 “잘 가”라고 하셨죠. 전혀 예상하지 못한 터치에서 선배의 센스와 위트가 묻어나더라고요. 되게 뻔할 수 있는 이별 장면인데 둘의 친근함과 끈끈한 관계가 밀도 있게 표현됐죠.
작품 제안을 받았을 때 유해진 배우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요. 이전에도 선배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는데요. 일에 대한 애정만큼 선배의 말씀과 사랑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타입인 것 같아요
선배에 대한 ‘니즈’가 정말 강해요(웃음). 배우의 꿈도 어릴 때 본 선배 배우들 덕분에 키울 수 있었어요. 선배 배우들의 역할이 서로 부딪히며 융합과 시너지를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 틈바구니에 있는 사람이고 싶다고 소망했으니까. <주유소 습격사건>(1999)에서 해진 선배의 존재감이 너무 강렬했어요. 꿈같은 선배와 함께 촬영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함께 있을 때 참 편안하고 인자하지만 연기할 때는 긴장감 있게 임하는 모습을 보면서요.
어느덧 20년 차인 선배로서 2030 배우들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글쎄요…. 각자 맡은 역할이 있고 해내려는 포부가 넘칠 텐데, 그 와중에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는 말. 제가 그러지 못했거든요. 연기를 잘하려는 열정이 강해서 긴장하고 집중하느라 현장에서 웃었던 기억이 많지 않아요.

아이보리 성냥 자수 니트는 Bottega Veneta. 밑단 패턴의 데님 팬츠와 고양이 키 링, 블랙 태슬 로퍼는 모두 Valentino. 골드 링은 Tom wood.
이제훈은 늘 긴장이나 불안과 함께하는 배우였나요
네, 연기적으로 가진 게 많이 없어서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 매 컷마다 굉장히 집중하고 에너지를 발산해 왔어요. 그러다 보니 여유가 없었죠. 경험이 없는데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인정합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조금 덜 치열했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지금은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고 나이도 들어서 약간의 여유와 편안함은 있습니다(웃음).
회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이는 종록에게 점차 스며드는 인범처럼 당신도 타인의 진심을 확인하면 가치관을 기꺼이 바꾸나요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종록 스타일에 가깝거든요. 일이 나고, 내가 곧 일이다! 예전에는 일과 나를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경험하고 있는 배우의 삶은 분리가 어렵더라고요. 쉬지 않고 꾸준하게 활동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열심히 일했으니 한동안 휴가를 떠나거나 내 인생을 되찾는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는 작품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프로젝트를 이어왔어요. 그게 힘들기보다 오히려 에너지였죠.
바빠야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에 가깝나 봐요
배우라는 타이틀을 뺀 자유인 이제훈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걸 최근에 많이 느꼈어요.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면 기회가 생기고, 마음이 닿는 곳에 갈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들어요. 저는 올해 계획이 줄지어 있음에도 내년을 걱정하는 사람이에요. 그렇다 보니 ‘만일 배우라는 직업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못 하게 되면 어떤 삶을 살 거냐?’는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더라고요. 두렵고 무섭지만 좋은 작품으로 극장에서 관객과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죠. 아직 궁극적 해답을 찾지 못했어요.
올해 공개된 <협상의 기술> 이후 지금은 <시그널 2> <모범택시 3> 촬영과 <소주전쟁> 홍보 일정을 소화하고 있어요. 소속사 대표이기도 하고요
그렇죠. 함께하는 식구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좋은 기회를 찾아 더 열심히 하는 거죠. 이런 인생을 언제까지 살 수 있냐고 반문하면 또 말문이 막힙니다. 80세까지 지금같이 쳇바퀴를 달리는 다람쥐처럼 반복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하면 의구심이 들기도 해요. 참 복합적이고 양가적인 생각이 끊이지 않네요. 그래도 지금을 돌아봤을 때 참 잘 살았다는 걸 스스로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지금 잘해야겠죠.

브라운 코트와 화이트 톱, 워싱 데님 팬츠는 모두 Ych. 블랙 홀로그램 부츠는 Christian Louboutin.
그럼에도 재미있으니까 멈출 수 없는 거겠죠
그럼요. 시나리오가 재미있으면 너무 힘들어도 그냥 재미있는 겁니다. 가열차게 달릴 수 있는 힘도 생기고요.
당장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면 어떤 도시, 어떤 계절로 향하고 싶나요
아주 덥거나 춥지 않은 선선한 계절. 산책하며 구경하는 걸 좋아해요. 음, 뉴욕을 택하겠습니다. 거리를 발길이 닿는 대로 정처없이 걷고 싶어요. 뉴욕의 독립극장도 둘러보고요. 대신 지금 촬영 중인 작품이 잘 마무리되면 떠날게요.
<소주전쟁>을 통해 배운 것은
내 관점과 작품이 이어진다는 사실. 이번 작품도 그렇고, 매 작품에 임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런 호기심이 들어요. 사람들이 무엇에 귀 기울이고, 무엇을 원하며, 어떤 것에서 무엇을 얻고 싶어 할까? 이 호기심을 뉴스나 신문, 사회 현상을 통해 계속 보게 되거든요. 그런 관심이 결국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소주전쟁>과 <협상의 기술>, 이 두 작품 사이에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어요.
그 지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열심히 일하고, 나이가 들면 더 편안한 삶을 원하죠. 그 편안함이란 결국 든든한 자산, 물질적 여유와 연결되는데, 그걸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러 매체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게 됐죠. 그 과정에서 지금 제가 바라보고 있는 인생, 세상에 대한 관점이 자연스럽게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되더라고요. 다양한 가치들이 제가 연기하는 인물 속에 녹아들고, 그 인물을 통해 인간 군상이 비춰지는 거죠. 결국 배우 이제훈의 필모그래피는 제가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는 걸 최근에 더 많이 느낍니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선택하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시그널 2>의 ‘박해영’과 <모범택시 3>의 ‘김도기’를 오가는 지금, 하나의 인물에 집중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두 인물을 병행하다니 왠지 복잡할 것 같은데요
정신적·체력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죠. 어느 정도 각오하고 시작했어요. 일상에서 누리던 것들, 이를테면 ‘소확행’ 같은 것도 내려놓고 오롯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요.

블루 스톤 메시 톱은 Kenzo. 베이지 와이드 팬츠는 Acne Studios. 하트 패턴의 타이는 Vivienne Westwood. 화이트 시스루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전 시즌의 인물을 다시 만나는 경험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 있어요. 다만 전작보다 업그레이드된 모습과 재미를 보여드려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습니다. 다행히 익숙한 배우들과 함께하고 있어 큰 힘이 되죠. <시그널 2>에는 김혜수 선배님, 조진웅 형이 함께하고 <모범택시 3>에는 김의성 선배님, 표예진 배우를 비롯해 우리 무지개운수 식구들 덕분에 인물 전환이 빠르게 가능합니다!
역할에 흠뻑 취해 숙취를 해소하듯 빠져나오는 나만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여행이 가장 큰 해소법인 것 같아요. 익숙한 공간과 사람들로부터 잠시 떨어져 낯선 곳에 머물다 보면 오히려 제 모습과 온전히 마주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전 작품에서 입고 있던 캐릭터의 냄새나 정취 같은 게 벗겨져요. 하지만 어떤 캐릭터들은 계속 머릿속에 남아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반면 닮고 싶어서 빠져나오기 싫었던 캐릭터가 있다면
<협상의 기술> ‘윤주노’가 그랬어요. 정말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각자의 입장과 바람을 이성적으로 조율해 가는 인물인데요. 감정을 섞지 않고 침착하게 상대를 설득하는 능력이 멋지더군요.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건 또 별개의 문제더라고요.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게 왜 별개의 문제일까요
아무리 옳은 판단이라도 감정이 따라주지 않으면 자꾸 엉뚱한 선택을 하게 돼요. 내가 어리석다고 느낄 때도 많고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막상 중요한 순간에는 감정이 앞섭니다. 그런 점에서 윤주노가 더 대단한 인물처럼 느껴졌어요. 좀 더 드라이하고,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블루 스트라이프 슬리브리스 셔츠와 블랙 라인 와이드 팬츠, 커머밴드는 모두 Wooyoungmi. 블랙 사각 페이턴트 슈즈는 Bottega Veneta.
오랜 시간 다채로운 이야기를 연기해 온 배우로서 스스로 경계하는 지점이나 함정이 있나요
있죠. 저는 늘 옳고 그름을 생각하며 믿고 살아왔어요. 제 경험에서는 그게 맞았거든요. 하지만 요즘엔 그런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이 생겨요. 세상은 더 이상 정답과 오답이 있는 시대가 아니더라고요. 객관적 지표보다 각자의 주관과 다양한 해석이 많아져서 혼란스럽습니다. 예전에는 분명하다고 믿었던 기준도 지금은 ‘그게 정말 맞았을까?’라는 의문이 들어요. 그 의문은 ‘진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내 말과 행동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체감하면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무게감을 두게 됐어요. 요즘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많이 하기보다 오히려 잘 듣고 정보를 정리한 뒤 신중하게 판단하려고 해요.
약속을 중요시한다고요. 자신과의 약속 중 하나가 유튜브 <제훈씨네> 채널이죠
맞아요. 지금은 약간 숙제 같은 존재입니다…. 극장에 가는 걸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서 그런 즐거움을 많은 분과 나누고 싶어 시작했는데요. 지금은 작품 촬영 중이라 채널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요. 어찌 보면 개인적 욕심 같지만, 유튜브 촬영이 자꾸 뒤로 밀리는 게 슬퍼요. 어쩔 수 없죠.
한국영화의 전통과 발전을 잇기 위한 마음가짐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한국영화라는 주제를 깊게 탐구한 계기는 영화와 함께한 유년기일까요
그런 것 같아요. 저는 다른 건 할 줄 아는 게 없고, 별로 관심도 없어요. 운동도 여러 가지 해봤지만, 저한테는 별 의미가 없어요. 일상에서는 영화가 유일한 즐거움이죠. 극장에서든 집에서든 OTT, DVD 등 서플먼트를 보며 제작 과정을 탐구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레드 패턴의 보머 재킷은 Takahiromiyashita The Soloist by 10 Corso Como Seoul. 화이트 톱은 Dries Van Noten. 아이보리 카브라 와이드 팬츠는 Valentino. 말발굽 형태의 네크리스는 Gucci. 레드 레터링 캡은 Hoete.
연출이나 제작에 대한 욕심도 꾸준하죠
솔직히 저는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거나 자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거의 없어요. 대부분은 ‘이거 해보고 싶다’ ‘궁금하다’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시작하게 돼요. 배우 도전도 그랬어요. 부족한 걸 알지만, 마음이 움직이면 뛰어드는 편이에요. 그런데 감독이라는 영역은 또 달라요. 저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아이디어와 의견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 과정에서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하니까요. 제가 직접 쓴 이야기든, 누군가의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과정이든 그걸 잘 다듬어 관객과 호흡할 수 있어야 하니까 더더욱 준비가 필요하죠. 혼자만 재미있어하는 습작이라면 제 울타리 안에서 해볼 수 있겠지만,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은 작품이라면 훨씬 더 신중하고 치열하게 해야죠. 그게 언젠가 가능해지기를 바라며 차근차근 준비 중입니다.
국어 교사로 근무하면서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해 소설가로 활동했던 이창동 감독은 마흔 넘은 나이에 박광수 감독의 권유로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각본과 조연출을 맡으며 영화계에 진출했는데요. 이처럼 시간에 한계란 없어 보입니다
학창 시절을 지나 20대에 접어들면 대부분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고민하죠. 저도 그랬고요. 그렇게 스스로에 대해 조금씩 명확한 방향을 정하고, 어느 정도 궤도를 따라 살다 보면 30대쯤엔 앞으로도 이 길을 계속 가겠다는 막연한 예측이 생기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예측을 과감히 내려놓고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죠. 정말 대단한 용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우리는 인생의 흐름에 익숙함이라는 관성을 너무 쉽게 부여하기도 하니까요. 새로운 걸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지만, 지금의 안정을 포기하는 게 두렵고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죠.
지금 당장 바꾸거나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기회는 결국 행동하는 사람에게 온다고 믿어요. 계속해서 꿈꾸고, 그것을 향해 조금씩이라도 움직이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웃음).
애니메이션도 좋아하나요
예전과 달리 요즘은 좋아하게 됐어요. 판타지나 호러도 그렇고, 장르가 점점 확장되면서 ‘이런 경험도 가능하구나’ 싶더라고요. 솔직히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어떤 방에 갇혀 영화만 보며 살라고 해도 가능할 것 같아요. 아직 못 본 영화가 많고, 계속 보고 싶으니까요! 호러 장르 중에서는 특히 ‘블룸하우스 프로덕션’이나 ‘A24’의 영화들이 제 시야를 열어줬어요. 삶을 생각하게 만드는 장르라고 느껴요. 곧 개봉할 <씨너스: 죄인들>이라는 영화도 기대 중인데, 좀비에 드라큘라까지 섞여 있는 장르 믹스물이에요. 예고편만 봐도 미쳤더라고요. 라이언 쿠글러 감독 작품인데, 진짜 기대돼요.

화이트 익스플로디드 셔츠와 블랙 플레어 팬츠는 모두 McQueen. 화이트 페이턴트 부츠는 Christian Louboutin.
영화 이야기만 나오면 바로 답변이 나오는군요(웃음). 고전 작품은요
저는 흑백 필름 시대의 고전영화를 많이 본 편은 아니에요. 저한테 큰 영향을 준 영화들은 아무래도 1990년대와 2000년대, 학창 시절 극장에서 봤던 동시대 작품이라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1950년대, 심지어 1930년대 작품까지 찾아보게 됐어요. 구로사와 아키라, 알프레드 히치콕 같은 감독의 영화를 접하고 나서 왜 많은 후배 감독이 그들을 ‘영화의 교과서’라고 부르는지 이해하게 됐어요. 장 자크 아노의 <장미의 이름>(1986), 코엔 형제나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 역시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해외에서의 극장 경험도 궁금한데요
뉴욕 여행 중이었는데, 우연히 극장 앞을 지나가다 포스터를 보고 들어가 본 영화가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이었어요. 1960년대 영화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필름 상영’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죠. 또 한번은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1968)를 보러 갔는데, 피어스 브로스넌 주연이 리메이크 작품이더라고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제가 본 원작은 1960년대 스티브 매퀸이 주연한 영화였어요. 그 고전 작품을 필름으로 보고 완전히 매료됐죠. 그리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를 오페라극장에서 필름으로 봤을 때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스탠리 큐브릭은 진짜 미래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그런 경험이 저에게는 단순한 관람 이상의 의미였어요. 시대를 초월한 영감, 그게 옛날 영화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방금 이야기할 때 어린아이처럼 눈빛이 반짝이고 신나 보였습니다.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나요
그럼요. 좋은 이야기는 한 사람의 가치관을 뒤흔들 수 있고, 스스로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엔 수많은 인생이 있잖아요. 영화 속 인물들의 고민이나 선택, 감정은 결국 또 다른 누군가의 현실이기도 하죠. 저는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더 넓게 보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제훈의 여정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어찌어찌 잘 돌파해 왔네!’ 하지만 앞으로 인생을 떠올리면 잘 보이지 않아요. 마치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처럼 미래는커녕 당장 눈앞도 뿌옇고 초점도 잘 맞지 않아요. 하지만 그래도 전진하고 싶습니다. 어딘가에 분명히 내가 꿈꾸는 게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도 그곳을 향해 계속 걸어가고 싶습니다. 안개를 뚫고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길 끝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겠죠. 그 믿음 하나로, 지금도 조심스럽지만 단단하게, 한 걸음씩 내딛고 있습니다.
Credit
- 에디터 정소진
- 사진가 곽기곤
- 스타일리스트 신지혜
- 헤어 스타일리스트 박민경
- 메이크업 아티스트 서미연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
엘르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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