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는 말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다.” 이에 상응하는 김기린의 말은 이렇지 않았을까. “시를 쓸 수 없어 그림을 그렸다.” 김기린은 김창열, 박서보 등과 교류하며 한국 단색화를 이끈 대표 주자 중 한 명이다. 하지만 단색 추상이라는 수식만으로 그의 작품을 설명하긴 어렵다. 캔버스 한 면을 가득 채운 색, 그것을 이루는 동일한 크기의 무수한 점들은 단순한 회화적 수행의 결과물이 아니다. 본래 김기린의 꿈은 시인이었다. 어느 정도로 진심이었냐면 한국외국어대학교 불문학과 졸업 후 생텍쥐페리 연구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날 정도였다. 그렇게 20대 때부터 프랑스에 머물며 김기린은 발레리와 랭보, 말라르메의 시를 읽고 집필에 몰두했다. “꺼무틱틱 멍든 시간을 차바리고 사는, 사는 고목은 나를 닮았다.” 김기린이 본명 김정환으로 신문에 투고했던 시 ‘고목’의 한 구절이다. “앙칼진 소리”로 가득 찬 세상 가운데 우두커니 선 고목에 자신을 비유했듯 1960년대에 한국인이 프랑스에 머물며 문학을 공부한다는 것, 그 가운데 시를 탐구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녹록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김기린은 30대 초반부터 미술사를 공부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를 저버린 건 아니었다. 그림은 그가 택한 또 다른 언어였으며, 그의 말마따나 “최종 목적은 언제나 시(詩)”였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로세로를 촘촘히 수놓은 미세한 그리드가 눈에 띄는데, 작가는 이를 원고지에 비유했다. 4면으로 나뉜 형태는 월남 후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던 함경남도 고향집의 문 창호지를 암시한다. 하나의 네모 칸에 수십 번 반복해 칠하고 쌓아 올린 물감 덩어리는 개별 음절 또는 단어, 나아가 한 편의 시구이며, 그림은 빛을 통과해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이다. 점으로 암호화된 김기린의 시는 영영 독해될 수 없는 ‘비밀의 서’로 남았다. 하지만 그가 낸 무수히 많은 창을 통해 우리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김기린의 개인전 <무언의 영역>은 7월 14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