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엘르보이스] 제법 재는 사랑
박참새는 말한다. 이런 졸렬함도 사랑이겠지. 내 친구들은 알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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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게 만난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고 덤덤하게 앉아 귤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잘 참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세 번까지만’을 세고 있었다. 그가 빠르게 삼진 아웃됐을 때 나는 말했다. 잘 살라고. 슬프긴 했지만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일로 매번 무언가를 쏟아부을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도 아직 귤 하나를 다 못 먹고 야무지게 씹고 있었다. 뭔가를 없애려는 사람처럼 씹고 또 씹었다. 할 줄 아는 게 씹는 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귤을 열심히 먹고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틀어놓은 유튜브 채널에서 누군가 말한다. “어릴 때 거절당한 경험이 많을수록 도움을 요청하기 힘들어하죠. 아무리 가까운 사람일지라도요.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아준 기억 자체가 없기 때문에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거듭 말하지만 이별에 대한 슬픔 때문은 아니다. 우연히 내 알고리즘에 등장한 중년 남성이 해주는 충고도, 조언도 아닌 어떤 일화와 내 애도 과정이 살짝 겹쳤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꼭 헤어지고 난 직후가 아니라도 항상 벌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때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말’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나는 ‘유튜브 아저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친구들과 함께 있는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나 슬퍼 ㅠㅠ” 제법 재는 사랑
」친구들이 그날 어디에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다음날 또 어떤 중요한 일이 있는지도 몰랐다.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내가 슬퍼하고 있다는 말 한 마디에 와준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슬퍼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이렇게 와주다니. 더 슬퍼졌다. 유튜브 아저씨가 말한 게 이 느낌이야? 서러웠다. 늘 보던 친구들인데 조금 달라 보였다. 나는 그 미세하게 다른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느라 정작 그들이 궁금해했던 이야기는 대충 때웠다. 어떻게 된 건데? 그냥 그렇게 됐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런데 너네는 내 말 한 마디에 이렇게 올 수 있는 거야? 난 그게 더 신기해, 도대체 어떻게 된 건데!!!!!!
서로를 다정하게 의심하고 추궁하면서 슬픔과 고마움, 놀람이 뒤섞인 채로 내 ‘최초 도움 요청의 날’이 이어졌다. 새벽까지 웃거나 더 웃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나는 불쑥불쑥 슬펐다. 얼마나 슬펐으면 우리한테 그런 말을 하냐며 내 얼굴을 쓰다듬는 언니 때문이었다. 나는 안 우는데 언니가 울고 있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쏙 들어갔던 눈물이 다시 나온다. 누군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도 그러고 싶어지니까.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점점 닮아가는 우리 둘을 보는 J. 그는 내가 아파서 조금 떠나 있을 때 매주 나를 찾아와주었다. 그런 우리를 언제나 바라보는 I가 있다. 밤이 지나면 다 잊겠지만 그 순간만큼 I는 기억의 천재였다. 말없이 웃고 이상한 때 박수를 친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져도 자기는 안 깨지고 말겠다는 듯이. 나는 이런 이상한 애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내가 제공받은 방식으로 이들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내게도 그럴 여유와 마음, 영혼의 가능성이 있을까? 나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언제나 언제 앓아눕는지, 얼마나 피곤한지, 버림받아도 좋으니 차라리 누워 있는 게 얼마나 더 좋은지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밤 누군가가 나에게 슬프다고 말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는 채로 이 애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 같아 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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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얻어 타면서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나는 언니처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언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나는 계속 말했다. 그래도 이제는 한번 해보고 싶어졌어. 다음날 지쳐 쓰러져도 그냥 달려가게 되는 그런 거. 그것도 사랑이려나. 아무튼 그런 거. 하루 이틀 망가지는 것쯤이야 조그만 각오 정도면 충분히 부딪혀볼 수 있는 그런 거.
언니는 버석하게 웃었겠지. 그냥 너나 잘 챙겨, 하면서.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찾아가야만 하는 일이, 그런 슬픔이 언니에게, J에게, I에게도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차라리 내가 없어도 괜찮은 기쁘고 헐렁한 날들만 있으면 좋겠다고. 이런 졸렬함도 사랑이겠지. 내 친구들은 알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대담집 <출발선 뒤의 초조함>, <시인들>을 펴냈다. 제42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며 첫 시집 <정신머리>를 출간했다. 글자에 가둬지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Credit
- 에디터 이마루
- 글 박참새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이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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