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가 작아서 때마다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가변적으로 만든 공간이 많다.
취향은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체험과 습득으로 채워지고 발견된 감각들이 자신만의 자리를 조금씩 찾아가며 완성되는 것이다. 원예가 박기철은 어릴 때부터 경험한 자연의 세계를 통해 식물에 대한 그만의 기호를 정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식물의 취향’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이후 그는 식물관 PH · 모노하 · DDP 등에 새로운 식물 세계관을 펼쳤고, 책과 전시 등에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며 고유한 영역을 천천히 확장해 왔다. 모두 광고 카피라이터였던 그가 한순간에 원예가가 된 것을 놀라워하지만, 그에게는 무척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운니동에 자리한 식물의 취향 쇼룸. 스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새로운 식물세계가 펼쳐진다.
원예가가 되기까지는 경기도 여주와 이천의 너른 자연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영향이 컸어요. 그동안 자연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 식물 저마다의 촉감과 형태, 특유의 매무새 등을 어렵지 않게 체득할 수 있었죠. 광고 회사에서 브랜드 언어를 탐구한 것도 현재의 브랜드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쇼룸 입구 벽면에 달려 있는 남다른 존재감의 식물은 밀레티아자포니카 삿수마.
식물의 취향 쇼룸은 운니동에 있다. 네댓 사람이 서면 꽉 찰 정도로 작은 공간이다. 문 맞은편의 거칠게 마감한 벽면에는 그가 아끼는 기물과 야생 초목을 걸어놓았다. 자신이 작업한 식물을 직접 촬영해 피그먼트 프린트 방식으로 표현한 커다란 작품도 곳곳에 보인다. 입구와 연결된 바닥은 독특하게 유리로 마감돼 있다. 그 속에 유물 발굴 현장처럼 꾸민 공간에는 이름 없는 기물이 미처 발견되지 않은 보물인 양 놓여 있다.
박기철 대표가 식물 작업을 할 때 사용하는 섬세한 도구들.
식물을 소개하는 곳은 식물이 아름다워야 해요. 공간 규모나 숫자가 아닌, 깊이와 가치로 말하고 싶었죠.
그는 쇼룸이 있는 가든타워에 들어오기 위해 많은 시간을 기다리며 공들였다. 꼭 이곳이어야 할 것 같았다. 번화한 서울 한가운데에 있는 오래되고 호젓한 빌딩, 그만의 분위기와 공간 구획은 어떤 곳도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식물의 취향 쇼룸에는 작은 기물 하나도 허튼 것이 없다.
가든타워에 가드닝을 하는 사람의 공간을 만드는 것도 운명 같은 느낌이었어요.
박기철은 이 쇼룸에서 국내의 야생 초목을 소개하고, 수업을 한다. 야생의 풀과 나무를 단지 아름다운 화분에 분갈이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특정 기술과 기법을 사용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창조한다. 그는 이 과정을 ‘후반작업’이라고 부른다. 식물을 담는 기물 또한 특별하다. 그는 엄선한 국내 자생지 식물을 투박하고 멋스러운 기물에 담아낸다. 대부분 분재를 작업하던 옛 어른들에게 화분을 공급한 1세대 도예가 선생님의 작업물이다. 그 속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와 솜씨, 시간이 깃들어 있다. 전국 각지에 소량으로 남아 있는 무명 기물을 발견하는 것도 그의 중요한 일과다. 각자 고유의 색과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도 그의 마음을 이끈다.
쇼룸으로 들어서는 바닥은 유리로 마감해 색다른 공간감을 더했다.
원예가 박기철이 식물의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구상한 공간은 한 곳 더 있다. ‘식물의 취향 아파트먼트’라고 불리는 세컨드 쇼룸은 그의 실제 주거공간이기도 하다. 사전예약을 거친 방문자들이 실생활 공간에 놓여 있는 식물의 형태와 분위기를 경험해 보는 용도로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여느 집과는 달리 평범한 세간살이나 소품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심지어 가구도 식탁 세트와 암체어 등 최소한으로 갖췄다. 비워진 공간에서 소나무, 붓순나무, 백화등 같은 식물들은 특유의 존재감을 발한다.
유리 바닥 아래에는 유물 발굴 현장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의 또 다른 공간이 연출돼 있다.
베란다 유리창 너머에는 푸르고 울창한 뒷산이 이곳을 넉넉하게 포용하듯 둘러싸고 있다. 박기철 역시 이 집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뒷산이라고 한다. 남다른 숲을 품은 구례, 산청, 함양 등 지리산 주변 지역과 제주 곶자왈을 다니며 특별한 영감을 얻는다는 그는 앞으로도 다양한 유형과 자신만의 언어로 야생 초목을 표현하려 한다. 책과 사진 작업에 이어 얼마 전에는 시집도 출간했다. 그 다음에 또 어떤 영역이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모든 것은 역시 식물의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그만의 호흡으로 차분하게 전개될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LC14 스툴과 LC1 라운지체어 두 개만 놓인 여백의 거실.
스테인리스스틸 스툴 위에 놓인 푸른 식물은 소사나무.
등칡 피그먼트 프린트 작품 앞에서 붓순나무를 매만지고 있는 박기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