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설계자의 의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개보수 공사를 거친 건물에선 오랜 시간을 견뎌낸 운치가 느껴진다.
서울 용산구 갈월동의 조선시대 지명을 처음 알았다.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갈월리. 일제강점기인 1941년에는 이름이 경성부 강기정으로 변경됐다가, 광복 후 1946년에 갈월동이라는 동네 이름을 되찾았다. 유신재는 지하철 숙대입구역과 남영역이 근접한 동네에 있다. 북쪽으로 서울역, 남쪽으로 용산역과 한강이 매우 가깝다.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도심 속 골목에서 96년간 살아온 유신재.
1926년에 준공된 건물은 3면이 도로에 접한 대지 위에 지어졌다. 서향으로 약간 경사가 있는 땅. 여기에 지상 2층 높이로 건축된 건물은 위에서 보면 지붕이 벼루에 기대 놓은 큰 붓 같은 형상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서울역과 용산역 등 주요 철도시설과 용산 병영 관련 일본인들이 이 일대에 많이 살았고, 이들을 위한 산부인과 병원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유신건축 회의실. 최소한의 손길로 다듬어 옛모습을 살린 천장과 벽면이 아름답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연와조 벽, 기둥과 보와 슬라브는 철근 콘크리트, 지붕은 목조 트러스 구조를 지닌 하이브리드 건축물. 해방 후 정부 소유에서 민간에 허락되지 않았던 건물을 국내 1세대 토목엔지니어링 회사인 ㈜유신에서 사옥으로 매입했다. 유신재의 운명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순간이다.
미팅 룸에는 폴 키에르홀름이 디자인한 PK22 라운지 체어를 두었다.
이후 건물은 줄곧 부지 매각이나 개발사업 등 이윤과는 먼 세월을 지냈다. 건물의 역사성이 오랫동안 단절되지 않았던 이유다. 건물주인 ㈜유신이 역삼동으로 사옥을 이전한 후 문서보관소로 사용되던 건물은 지난해, 30년 만에 또 한 번 다시 태어났다. ㈜유신건축 종합건축사사무소(이하 유신건축) 사옥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유신건축은 낡아가던 건물을 장기 임대했고, 건축설계를 위한 공방으로 사용하며 대를 잇는다. 희소한 이야기를 품은 건물의 리모델링의 설계는 유신건축 김지덕 · 김우영 건축사가 맡았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다. 근래 개보수 작업을 마친 건물에선 재생건축에 관한 명료한 입장이 빛난다. 나이를 지우는 일에는 어떤 관심도 없었던 듯 시간의 흔적과 옛 골격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김지덕과 김우영은 건물의 오랜 얼굴이 그대로 복원될 수 있는 방향에 초점을 뒀다.
벽돌과 거친 콘크리트로 이뤄진 건물 내외부 벽면은 빛바래고 패인 흔적을 최대한 살렸다. 지금은 보기 힘든 빗물받이와 내벽 모서리의 조각 디테일이 흥미롭다.
허물어져 가는 부분과 하자 등을 보수해서 건물이 다시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공간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 사용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치밀하게 고민했다. 비가 새던 기와 대신 징크 소재 지붕을 대고, 무너져 가던 지붕재를 보강했다. 본래 건물이 갖고 있던 재료의 성질을 덮지 않기 위해 바닥의 레벨을 맞추는 작업도 하지 않았다.
벽돌과 거친 콘크리트로 이뤄진 건물 내외부 벽면은 빛바래고 패인 흔적을 최대한 살렸다. 지금은 보기 힘든 빗물받이와 내벽 모서리의 조각 디테일이 흥미롭다.
공사 전까지 목조였던 출입문과 창문은 알루미늄으로 교체한 뒤 냉난방과 통신, 소방시설 모두 새로운 조건에 맞게 만들었다. 과거 시대의 건축 언어와 시공법, 재료, 숱한 개조의 역사와 흔적을 없애지 않았다. 지붕 틀의 상량필적으로, 용의 신성함을 비유해 화재예방을 바라는 기원 문구와 상량한 일시가 적혀 있다. ‘서기1956년 5월 7일 오후 4시경’. 도면이 남아 있지 않아 실측에 많은 정성을 들일 정도로 95년 된 건물의 시간을 완전히 파악하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복원과 보존이 기준이 되자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건축물의 생애 주기 동안 발생하는 탄소량의 상당 부분이 시공 단계에서 야기되는데 재생건축은 내재된 걸 그대로 두는 행위이니 큰 의미가 있어요. 건축가가 환경을 위해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죠.” 개보수 공사 이후에도 고스란히 남은 시간의 흔적은 유신재의 독특한 정체성이 됐다. 시대 조류나 요구사항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해체되거나 사라져온 근대건축물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벽돌과 거친 콘크리트로 이뤄진 건물 내외부 벽면은 빛바래고 패인 흔적을 최대한 살렸다. 지금은 보기 힘든 빗물받이와 내벽 모서리의 조각 디테일이 흥미롭다.
벽돌과 거친 콘크리트로 이뤄진 건물 내외부 벽면은 빛바래고 패인 흔적을 최대한 살렸다. 지금은 보기 힘든 빗물받이와 내벽 모서리의 조각 디테일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