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지가 입은 레더 코트는 Salon de Seoul. 실크 셔츠는 Leey. 비대칭 레더 스커트는 Alice+Olivia.
베이비박스가 도입된 2009년부터 5년간 베이비박스로 온 아기들과 부모의 상담 일지를 분석해 데이터를 추출한 ‘베이비박스 프로젝트’가 현재 비투비의 위기 가정 지원 프로젝트 시초가 됐다
2013년 11월, 신문에서 우연히 베이비박스 관련 기사를 읽었다. 당시 베이비박스는 가장 뜨거운 이슈였고, 그로부터 2년간 지속적으로 기사가 쏟아졌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범죄’ ‘성적으로 문란하고 무책임한 부모들의 산물’ ‘영아 유기를 조장하는 박스’…. 헤드라인은 제각각이었다. 시간은 흐르는데 세상과 언론의 프레임은 바뀌지 않았고, 해결책도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이들의 부모는 어떤 상황에서 베이비박스를 찾는 것일지, 해결 방법은 없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공공커뮤니케이션 컨설팅을 했던 이력을 살려 베이비박스가 도입된 시점부터 2014년까지 총 512명의 아기, 1000여 건의 상담 일지를 분석하는 ‘베이비박스 프로젝트’에 착수하게 됐다.
데이터를 통해 목도한 해결의 실마리는 무엇이었나
박스에 아이가 놓이게 되는덟 가지 경로를 파악했다. 청년 빈곤, 불안정한 주거 환경, 원가정의 부재, 비혼 부모, 아이의 장애나 부모의 건강 이상, 강간 등 원치 않은 임신, 성과 피임에 대한 무지, 사회가 전형적이라 여기는 가족의 형태가 아닌 경우 등이다. 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청소년이 집단 강간을 당하고 임신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지도 못했는데 장애아가 태어난 경우처럼. 대부분의 사례는 이런 상황적 요인이 여러 개 중첩돼 있다. 데이터를 보고 나니 과연 누가 그 상황에서 베이비박스를 고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다. 유의미한 건 30%의 부모는 분명 아기를 다시 데려간다는 거다. 이 점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아기들이 ‘버려진’ 것이 아닌 ‘맡겨진’ 것으로 사고 방향을 틀어 문제의 근본에 다가갔다. 이 문제를 보다 구조적인 관점에서 봐야 하는 이유는
남녀가 만나 임신하고 태어난 아기가 베이비박스까지 오는 과정을 강의 상류, 베이비박스에서 아기가 보육원으로 보내지는 과정을 강의 하류라고 봤다. 상류의 어떤 지점에서 개입하면 강의 물살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는 부모가 한두 명일 경우에야 나빠서 혹은 무책임해서라는 말을 붙일 수 있겠지만 데이터상으로 해마다 몇 백 명이, 10년 넘게 이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개인의 책임 범주를 크게 넘어서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분명하다. 보호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위기 가정의 부모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무엇인가
다름 아닌 정보다. 사람들은 위기 부모가 아기를 충동적으로 버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들이 임신 사실을 알고 가장 먼저 하는 건 검색이다. 여러 옵션을 찾아보다가 최후의 수단으로 베이비박스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 하루종일 정보만 찾는 나조차 뿔뿔이 흩어진 정보를 찾고 어려운 용어를 이해하기 어려운데, 갈 곳 없이 밖을 전전하는 임산부가 지원 정보를 찾기가 쉬울까? 그런 이유로 실질적인 정보를 모아 제공하는 웹 솔루션 ‘품’을 만들게 됐다.
2020년 론칭한 ‘품’은 현재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공공과 민간 자원을 제공해 주거와 돈, 건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메우는 걸 우선으로 한다. 만약 임대주택을 지원받아도 보증금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고, 즉석 밥을 전달해도 먹을 그릇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지원의 사각지대에 빠지지 않게 현장 전문가들의 노하우를 공개한다. 직접 컨설팅도 한다. 기관을 통한 상담과 문제 해결이 1:1로만 가능하다면 ‘품’처럼 원스톱 커뮤니티화된 플랫폼은 수천, 수만 명까지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다수를 구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중점을 뒀다.
‘품’이라는 이름처럼 부모들의 눈높이에 맞춘, 쉽고 따뜻한 웹 디자인이 돋보인다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도 중요하다. 캐릭터나 그래프, 도표를 활용해 시각적으로 단순화했다. ‘뉴닉’처럼 자원 내용을 친근하게 풀어 설명하기도 했고. 소위 어려운 가족이라면 비혼모를 주로 떠올리는데, 더 많은 형태의 가족을 포용할 수 있는 편견 없는 UX·UI 디자인에 신경 썼다.
‘품’의 영역과는 구분되는, 구직 솔루션에 초점을 맞춘 웹 서비스 ‘옥토포수’가 11월 문을 열었다
〈나의 문어 선생님〉에서 모티프를 따왔다(웃음). ‘품’이 위기 임신 솔루션이라면, ‘옥토포수’는 개인 맞춤형 자립 지원에 초점을 뒀다. 한부모에게 일을 하면 받을 수 있는 정부지원수당을 문어 선생님이 쉽게 설명해 주는 구조다. 예를 들어 4시간 일하면 소득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지, 200만 원을 벌고 싶다면 얼마큼 일하면 될지를 자신의 상황에 따라 계산해 볼 수 있다.
위기 임신과 자립 지원을 양분한 지원 시스템 망을 구축하려는 이유는
위기 임신에서 벗어나도 사실상 스스로 먹고살 수 없다면 위기는 끝나지 않는다. 올해 미혼모 시설에서 퇴소한 18세 비혼 한부모를 지원한 적 있다. 씩씩하게 자립 의지를 내비쳤지만, 기초생활수급을 받은 지 3개월 만에 “수급 끊기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라고 호소하더라. 수급이 고착화되면 아무리 일에 대한 의지가 강해도 그 굴레를 벗어나기 쉽지 않다. 채용돼도 수급 단절의 두려움으로 잠적한 이들도 있다. 정부의 생계 지원이 이어지는 동안 자립의 다음 단계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또 여성 한부모의 경우 일할 수 있는 영역이 네일, 바리스타, 펫 미용에 한정되는데 이들도 개성과 적성을 갖고 태어난 고유한 개인이지 않나. 보통 진로 탐색은 청소년기 가족의 울타리에서 이뤄지는데 ‘품’과 ‘옥토포수’가 그 기회의 시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위기 가정의 부모들을 대하며 가장 경계하려는 태도는
동정하지 않는 것. ‘불쌍한 사람’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순간 자립의 가능성은 흩어진다. 또 도움만 받는 자아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것도 경계한다. 지원을 받은 부모도 다시 육아용품 등을 다음 이들에게 나누며 순환을 이어가고 있는데,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 자체가 상황을 다르게 만든다. 또 후원자에게 빈곤 포르노를 이용한 모금 활동도 하지 않는다.
비투비와 기업과의 협업 소식 또한 꾸준히 전해진다
정말 중요한 문제다. 기업에서 일자리를 제공해야 실질적으로 지원자들의 생계가 이어진다. 최근 ESG 경영 흐름을 타고 협약에 참여하는 기업이 많아지는 추세지만 위기 가족에 대한 이해를 끌어올릴 필요성은 여전하다. 같은 비혼모라도 실제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40대보다 어린 엄마를 선택적으로 채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
위기 가정과 청소년 부모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복합적이고 고질적인 사회 문제 중 사람들이 손 놓고 있는 것에 인생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베이비박스는 즉각적인 행동을 일으키더라. 사실 밥을 굶어본 적도, 지붕이 없는 곳에서 자본 적도 없다. 부모님께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 내게는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돌아갈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누군가의 손에 길러진 경험의 유무가 아기를 키우고 포기하는 선택의 당락이 되기도 한다. 이 대물림의 고리를 끊고 아기를 살리려면 결국 부모를 살려야 했다.
해마다 정신적·경제적으로 정말 지독한 슬럼프가 찾아온다. 비영리 기업은 투자자도 잘 없고, 지원을 받아도 인건비로는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착하지만 무능한 사람들’이라는 시선도 감내해야 하고, 원래 좋은 일하는 곳이라는 인식으로 정당한 재정적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내년 상반기 ‘품’의 앱 버전 또한 출격을 준비 중이다
웹 버전이 자원을 모아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면, 앱은 정보 입력과 푸시 기능을 더했다. 예를 들어 6개월 아이가 1년이 됐을 때 지원 내용이 바뀌어도 적절히 대응할 수 있게끔. 위기 임신의 사례는 다양하고, 그 위기 구간을 통과하려면 어떤 순서로 지원받아야 할지 알아야 한다. 주거와 경제 문제를 해결하면 의료와 출생신고 등 법률적 문제, 자립까지 각 단계에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 로드맵을 통해 개별 매핑할 수 있을 것이다. 일시적 지원을 넘어 위기 부모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고, 지원 기관끼리도 분야별 협업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품’의 궁극적 목표다.
profile 김윤지 현 사단법인 비투비 대표. 하버드 케네디 스쿨 공공정책학 석사, 전 플레시먼힐러드 코리아 공공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 전 내셔널지오그래픽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