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명품’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_선배's 어드바이스 #13

무위자연사상에 가까운 미니멀리즘, 자연주의 열풍 속에서도 명품에 대한 욕망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당신. 대체 무엇이 맥박을 뛰게 한단 말인가? 모호함 속에 부유하지 말고 이제 하나의 이유에 정착해 보자. 아니면 모두에…….

BY권민지2020.05.18
‘명품’이라는 단어를 언제 처음 들어봤던가? KBS 〈TV쇼 진품명품〉에서? 국내에서 명품이란 말을 처음 썼다는 모 홍보대행사의 보도자료에서? 아니다. 거품경제가 꺼지기 시작했지만 그런 줄 몰랐던 1980년대 말 일본에서다. 여대생부터 신입사원, 호스트, 중∙노년 남성들까지 유럽 디자이너 브랜드 물건 한둘쯤 걸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명품’을 알려준다며 각 브랜드 역사부터 전 제품을 낱낱이 보여주는 카탈로그에 가까운 잡지, 단행본이 날개 돋친 듯 팔리던 풍경을 기억한다.
 
1960년대 셀린의 카탈로그 광고. JTBC Plus 자료실

1960년대 셀린의 카탈로그 광고. JTBC Plus 자료실

본래 명품이란 말은 사전에 있듯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 또는 그런 작품’, 즉 마스터피스(masterpiece)를 의미했다. 지금처럼 값비싸고 유명한 브랜드의 상품 전체라는 뜻은 없었다. 그러니까, 물건이 나온 후 써본 소비자나 비평가가 부여한 영광이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지는 금수저 혈통 따위는 아니었던 것이다.
 
전후 일본 경제의 대호황으로 중산층 이상 계층이 성공을 과시할 훈장 같은 매개체가 필요해졌다. 경제적 동물이라 불릴 만큼 일에 매달렸던 세대가 마침내 여유가 생겨 서양, 특히 유럽 여행길에 올랐을 때, 왕족과 귀족에게 공급한다는 오트 쿠튀르 디자이너 하우스들을 발견했다. 역사와 품질의 대명사인 교토 기모노나 아리타 자기에서 떠올리던 ‘명품’이란 이미지가 그들 상품에 자연스레 덧씌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1972년 구찌, 1978년 루이 비통이 도쿄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명품’ 마케팅이 시작됐다.
 
평생 함께할 친구 같은 물건
아시아에서의 광풍 초기에 명품은 그 자체로 품질을 대변했다. 유럽 왕족과 귀족이 신뢰하고 가족 기업이 공방에서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만드니 믿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시대를 초월한’, ‘대를 물려 쓰는’ 물건이란 광고 카피가 흔했고, 설령 내구성이 떨어지거나 작은 결함이 있는 브랜드였더라도 아시아 소비자 요구 수준에 따라 품질 관리를 하면서 실제 고품질이 되기도 했다. 30년 이상 된 빈티지 가죽 가방들을 보면 대체로 안감까지 스웨이드 등 부드러운 가죽이나 실크 등 좋은 소재를 써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게 보이고 겉가죽이 낡으면 왁스를 발라 광을 낼 수 있는 등 실용성도 미덕이다.
 
장인들과 공방에서, 페라가모. JTBC Plus 자료실

장인들과 공방에서, 페라가모. JTBC Plus 자료실

2010년대 초반까지도 그런 면을 강조하는 게 주요 마케팅이어서 2011년 구찌는 이탈리아 장인들을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 입점 매장으로 초빙해 가죽을 자르고, 바느질하고, 대나무를 구부려 손잡이를 다는 등 ‘아티잔 코너’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때 장인들이 만든 가방을 산 소비자들은 평생 함께할 좋은 물건이란 확신에 경건해졌으리라.
 
지금은 그때만큼 정교한 물건이 확실히 줄긴 했지만 씹고, 뜯고, 맛보면 분별할 수 있다. 쉬운 방법은 빈티지 가게를 뒤지는 것.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시아에선 빈티지가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상태 좋은 클래식 아이템이 ‘안 쓰는 엄마 가방’ 식으로 나와 있는 게 많다. 현재 구찌, 디올, 루이 비통 등 상당수 브랜드가 여전히 클래식 모델에서 영감을 받았으면서도 모던한 디자인을 내놓고 있으니 그 원형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본인의 이름을 딴 가방을 든 그레이스 켈리. JTBC Plus 자료실

본인의 이름을 딴 가방을 든 그레이스 켈리. JTBC Plus 자료실

또, 에르메스의 가방과 스카프, 로로피아나나 아뇨나의 캐시미어 코트, 미키모토의 진주 목걸이, 리모와의 클래식 캐리어처럼 최소 수십 년간 씨간장처럼 거의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명품을 선택하는 이유가 그것이라면 빅 모델, 트렌드 등에 연연하지 말고 온전히 본질에 집중해보자.  
 
그 자체로 패션이 된 브랜드에 대한 사랑
영화 〈해롤드와 쿠마 2〉에서 난봉꾼 닐 패트릭 해리스는 성매매 여성들에게 불에 달군 인두로 자기 이니셜을 찍으려다 총에 맞아 죽는다. 그 직전 분노에 찬 한 여성이 외친 말이 “That prick f**king branded me!”다. 브랜드란 단어가 강렬하게 뇌리에 꽂힌 순간이었다. 브랜드(brand)는 불로 새긴다는 고대 노르웨이어 ‘brandr’, 가축에게 낙인을 찍는 영어 ‘burned’ 등 불로 소유를 의미하는 표식을 새기는 행위와 어원이 이어져 있다.
 
JTBC Plus 자료실

JTBC Plus 자료실

1896년 루이 비통의 조르주 비통이 모조품을 퇴치하겠단 의지로 만든 모노그램이 대히트하더니 물건 어딘가에 누구네 공방에서 만들었다는 표식으로 조그맣게 새겼던 브랜드명이 날로 커지고 대담해졌다. 모노그램 패턴은 구찌, 셀린, 디올 등으로 번져 나갔고 로고는 번쩍번쩍하는 금속 소재로 가방이나 구두 앞면 정중앙에 자리하게 됐다. 브랜드들이 패션의 주체로 부상한 건 LVMH의 피에르 아르노 회장 같은 전문 경영인들이 가족 경영 시스템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고 온라인 판매라는 혁명적 유통 채널을 선택하면서부터다.
 
기존 고객층보다 스무 살은 젊은 아이돌, 인플루언서가 걸치고 소셜미디어에서 보여주려면 브랜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디자인이어야 했다. 거기에 ‘80년대 미국 힙합 신과 1990년대 동유럽 스트리트 감성까지 돌아오며 브랜드 로고는 역사상 최대로 팽창했다. 백 년 가까이 간직한 로고를 단순하고 강렬한 ‘폰트’처럼 바꾼 브랜드도 많다. 그 사이 디자이너 하우스들의 1세대 쿠튀리에들은 거의 다 스러졌다. 죽은 자의 이름으로 몸을 뒤덮는다는 건 그들에 대한 순수한 경외와 함께 가장 원초적인 패션에의 욕망을 표출하는 행위 아닐까?
 
로고가 가방보다 커질 지경인 발렌티노 슈퍼비 백. 사진/ 이선배

로고가 가방보다 커질 지경인 발렌티노 슈퍼비 백. 사진/ 이선배

브랜드를 사랑하는 조금 다른 방법도 있다. 한 친구는 디자인이 거의 같은 알라이아 가방을 색상별로 꾸준히 사 모는데 그 펀칭 디테일에 디자이너가 생전 즐겨 썼던 레이스와 니트 짜임이 담겨 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친구는 아제딘 알라이아란 브랜드를 통해 디자이너를 추모하며 숭배하고 있다.
 
우량주보다 탄탄한 투자 가치와 환금성
최근 샤넬 제품 가격이 오르기 전 사려고 새벽부터 매장 앞에 줄 서 있다 문이 열리자 마자 달려 들어가는 서울의 ‘오픈 런’ 풍경이 외신에까지 보도됐다. 샤넬 가방이 어느덧 예단, 예물 등 관혼상제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십여 년 전 후배가 샤넬 클래식 미디엄 플랩 백을 면세점에서 1백만 원대 후반에 산다고 했을 때 “너무 오른 거 아니야?”라고 한 게 뒤늦게 미안해질 만큼(다행히 그때 샀다) 가격이 껑충 뛰어올랐다. 미국 달러 기준으론 1955년 220달러에서 시작한 가격이 이제는 6496달러다. 시대에 따른 물가상승률도 있겠지만, 가격이 오르는 데도 수요가 증가하는 베블런 효과를 생각해 보면 명품 브랜드들도 고객의 신뢰도, 차별화 등을 고려해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에르메스와 샤넬의 클래식 백들. 사진/ 이선배

에르메스와 샤넬의 클래식 백들. 사진/ 이선배

내내 잘 썼지만 이제 가벼운 가방을 주로 든다는 어느 어르신과 최소 삼십 년은 된 에르메스 켈리 백을 파는 길에 동행한 적이 있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가방을 얼마나 쳐 주겠어?’ 했던 기우와 달리, 중고 명품점 직원은 1분 정도 가방 안팎을 들여다보곤 곧바로 현금으로 6백만 원 넘는 금액을 꺼내 왔다. 혹시 마음 바뀔까 해서인지 가방은 황급히 챙겨 가며…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르신은 2백만 원대에 사셨다고 한다. 에르메스 버킨과 켈리 백은 수십년 간 평균 매년 12~14%씩 올랐는데 당분간 생산량이 늘어날 기미도,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수요가 줄 조짐도 안 보인다. 소모품인 것과 근래 저금리 기조를 감안하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웬만한 우량주보다 안정적 투자라는 평이다.
 
코로나 19 로 전체적 소비는 줄었지만 일부 명품 브랜드들은 보복 소비의 수혜를 보고 있다. 사진/ 이선배

코로나 19 로 전체적 소비는 줄었지만 일부 명품 브랜드들은 보복 소비의 수혜를 보고 있다. 사진/ 이선배

하지만 모든 ‘명품’이 투자 가치와 환금성이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중고 시계 전문점 개업식에서 내 시계는 현재 가치가 얼마나 되나 주인에게 물었더니 “이런 여성용 보석 시계는 살 땐 비싸지만 팔 땐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에요.”라며 멋쩍게 웃었다. 이유는 남성 시계 대비 크게 기계적 가치가 있는 게 아니고, 하이엔드 브랜드여도 희소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만큼 수요가 별로 없으며, 결정적으로 단종됐기 때문이란다. 즉, 개성은 없어도 예물, 예단용 가방, 시계처럼 대중이 잘 알고 꾸준히 수요와 공급이 있는 브랜드와 모델이 투자 가치뿐 아니라 환금성도 있다는 것. 재판매를 통한 투자는 점점 더 활성화될 예정이다. 최근 미국의 명품 핸드백 재판매 플랫폼 리백(Rebag)은 6천8백3십만 달러란 기록적 펀딩에 성공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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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이선배
  • 사진 이선배/ 언스플래시/ JTBC Plus 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