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LIFE

한국의 데이트=롤 플레이? #라파엘의 한국 살이4

한국의 데이트 문화엔 매뉴얼이 있다. 첫 만남의 방법부터 데이트 코스, 스킨십 진도에 대한 것까지 모두가 지켜야 하는 가이드가 있는 지금,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연애하지 않을 권리 같은 건 없다.

BY권민지2020.02.14
그날이다. 우리가 이미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진 것을 축하하는 날, 파트너나 애인한테 초콜릿이나 장미를 선물하는 날, 밸런타인데이. 참 ‘러블리’한 날이다. 물론 굉장히 뻔하긴 하지만.
 
뻔하다는 건 비단 밸런타인데이에만 국한된 표현은 아니다. 한국의 데이트 문화 전부가 그렇다. 마치 시스템화된 것처럼, 데이트에는 모두가 따라야만 하는 매뉴얼이 있다. 마치 누구나 데이트를 할 수 있다고, 아니, 데이트를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영국에 살았던 때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여기서 연애는 의무다. 2020년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연애하지 않을 권리 같은 건 없다.
 
애니메이션 〈연애 놀이〉 스틸

애니메이션 〈연애 놀이〉 스틸

데이트에 대한 압박은 한국어 어학원을 다녔을 때부터 시작됐다. 이를테면 (남자인 경우에) “어떤 여자 스타일을 좋아해요?” 같은 말들을 연습해야만 했다. (저 ‘이성애규범성(이성애적 관계만이 옳은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이 바탕에 깔린 질문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말자. 어쩌면 다음 기회에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그리고 이런 대답들도 함께 배웠다. “나는 날씬한 여자가 좋아요” “나는 긴 머리의 여자가 좋아요” 모두 외모와 관련된 문장들이었다. 물론 그건 진짜가 아니고 어학원에서 하는 일종의 상황극일 뿐이었지만 나는 좀 불편했다. 아니, ‘좋아하는 스타일’이 도대체 무슨 뜻이지? 좋아하는 타입이라는 게 ‘필요’한가? 하지만 얼마 후 나는 왜 이런 수업이 필요한지를 알게 됐다. 생각해 보면 꽤 실용적인 커리큘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타입에 관해 질문을 주고받는 일이 굉장히 흔하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원과 회사를 다니면서 “소개팅할래?” 혹은 “미팅할래?”란 소리를 지겹도록 들었다. 한 1백 번쯤. 나는 사전에 계획된 데이트만큼 지루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다들 소개팅 주선에 앞장섰다. 소개팅이야말로 (한국에서 필수 조건인) 남자친구, 여자친구를 만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의 하나라면서.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스틸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스틸

그래서, 소개팅의 과정은 어떻냐고? 간단하다. 먼저 (사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감안한 채로) 소개팅 주선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옷을 차려입고, 향수를 뿌린 채, 토요일 밤 저녁 7시에 강남역 부근에서 약속을 잡는다. (이미 50명쯤 되는 남자들이 소개팅을 위해 강남역을 서성거리고 있을 거다)비싼 레스토랑(한식이 아닌 곳을 고를 것)에 가서 식사한 후에는 커피를 마신다. 언제, 누굴 만나도 똑같은 수순이다. 헤어지고 난 후 상대방이 마음에 들었다면 30분 안에 ‘애프터’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스틸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스틸

서로 호감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한두 번쯤 더 만나고, 공식적으로 “나랑 사귈래?” 같은 얘기를 건넨다. 때로는 사랑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둘 중 하나가 확신이 없다거나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면? 다른 소개팅을 하면 된다. 사귀자는 말 전까지는 다른 사람을 만나도 괜찮은데, 보통 이런 상황을 ‘썸’ 혹은 ‘어장관리’라고 부른다.
 
데이트 때마다 같은 옷을 입어도 될 정도로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커플링을 맞추러 간다. (종로 3가에 위치한 커플링 가게들이 얼마나 북적이는지 보라.) 토요일에는 보통 영화를 본다. 하지만 미리 예매를 해 두는 것이 좋은데, 왜냐하면 다른 커플들도 모두 극장에 가기 때문이다.  물론 달력에 100일이 언제인지 체크를 해 두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100일을 축하하는 건 커플의 의무다. 200일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기념일들을 기억하고 성대하게 챙기는 건 지금 이 관계가 얼마나 건강한지 말해주는 지표와도 같다. 스킨십의 진도가 고민이라면?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걱정하지 마라. 여기에도 매뉴얼이 다 있다. 모텔은 일종의 올인원 섹스 패키지와도 같다. 방, 프라이버시, 콘돔, 윤활제, 사정지연제…. 정말이지, 완벽하다.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스틸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스틸

모든 것이 규칙대로다. 이쯤 되면 데이트와 롤 플레이의 다른 점을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렇게 잘 짜인 가이드북이 마련돼 있는 이상 데이트를 피할 수 있는 적절한 핑계 따위도 없다. 만약 계속 싱글로서의 삶을 고집한다면 당신은 돌연변이처럼 취급받을 거다. 사회 규범에 어긋나고, 이상하며, 뭔가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마냥 말이다. 나의 옛 동료 중 하나는 사무실에서 ‘모태솔로’라고 놀림 받곤 했다. 그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고 자연히 사무실의 공공연한 농담 거리 중 하나가 됐다 (이건 일종의 직장 내 괴롭힘 아닌가? 아니, 엄밀히 말해서 성희롱이지 않나? 영국의 오피스에서는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반드시 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렇지 않으면 성 기능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으니까. 더욱 무시무시하게도, 어쩌면 사람들은 당신이 무성애자 거나 심지어 동성애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런 종류의 발언들 역시 100% 성희롱이다.)
 
애니메이션 〈연애 놀이〉 스틸

애니메이션 〈연애 놀이〉 스틸

이성애자에게도 충분히 괴로운 상황이지만, 만약 당신이 LGBTQ라면 연애에 대한 압박은 견디기 힘들 정도일 것이다. 나는 이미 애인이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싱글인 척하고, 소개팅에 나가서 돈과 시간을 낭비해야만 하는 LGBTQ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불편한(그리고 불필요한) 소개팅 주선을 피하기 위해 페이크 커플링을 끼고 다니거나 하물며 이성 친구와 로맨틱한 사진을 찍은 후 마치 ‘평범한(그게 뭔데?)’ 연애를 하는 것처럼 위장한다는 친구도 있다. 왜? 생식력 있는 이성애자, 즉 ‘정상인’임을 증명해야 편한 회사 생활이 가능하니까. WTF?
 
한국 사회가 얼마나 기념일에 집착하는지 단박에 보고 싶다면 편의점에 가면 된다. 밸런타인데이를 포함한 매 기념일마다 편의점 앞은 초콜릿, 과자, 꽃, 곰 인형, 빼빼로들로 가득 찬다. 어찌나 대대적인지 왠지 꼭 사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느껴질 정도다. 몇몇 한국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저걸 볼 때마다 짜증이 나.” 그들이 매 기념일마다 우울해지는 이유는 초콜렛이 전시된 광경 자체가 그들이 싱글인 것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었다. 왜지? 싱글인 것은 범죄가 아니야! 누군가와 사귀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게 당연해! 알게 뭐람.

 
요지는, 이건 사회적 분위기의 문제라는 거다. 오늘, 즉 밸런타인데이, 한 달 후에 있을 화이트 데이 그리고 매달 찾아올 00데이들은 연애하지 않을 권리 따위는 무시하는 사회의 상징적 예다. 이 숱한 기념일들이 실은 기업들이 만든 상업적인 술수인 것과는 상관없이, 싱글인 우리는 자꾸만 이상한 패배감을 맛봐야 한다.
 
영화 〈연애의 온도〉 스틸

영화 〈연애의 온도〉 스틸

자, 마지막으로 편의점 앞의 초콜릿 디스플레이에 루저 기분을 느끼고 있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주변에서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파트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보았나? 나의 경우엔 몇 되지 않았다. 오늘 길거리에 초콜릿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수나 화려한 밸런타인데이 축제 분위기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적은 수였다. 그게 싱글인 것보다 훨씬 더 슬픈 일이다.
 
.

.

 
*한국 살이 9년 차, 영국에서 온 남자 라파엘 라시드가 쓰는 한국 이야기는 매주 금요일에 업데이트됩니다. 
 

'라파엘의 한국 살이' 더 보기

 
 

Keyword

Credit

  • 글 라파엘 라시드
  • 사진 각 영화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