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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니아', '지구는 평평하다'는 말도 신념이 되는 시대에서

22년 전의 신하균 만큼 끔찍하면서도 처량한 제시 플레먼스의 광기.

프로필 by 라효진 2025.10.29

영화 <지구를 지켜라!>는 시대를 앞서간 작품일까? 아니면 그 안의 시대가 전혀 변하지 않은 채로 시간만 흐른 걸까? 22년 후 <부고니아>로 다시 태어난 이 이야기는 뜻밖의 질문을 띄운다. <지구를 지켜라!>의 2003년산 상상력을 현 시대에 대입해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탓이다. 주인공 성별 반전 등의 자잘한 설정 외 내용상의 큰 차이가 없는 <부고니아>를 2003년에 가져다 놓는다 한들 달라질 건 없다. 두 영화가 힘주어 말한 건 인간의 가장 원초적 생존 방식 중 같은 종을 파괴하려는 악마성이 있다는 보편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럼 영화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는 진화인가, 퇴화인가?



인간이 지닌 악마성을 '퇴화'로 본다는 점에서 <지구를 지켜라!>는 낭만적이다. <부고니아> 역시 이를 계승한다. 인간은 늘 다른 인간에게 잔혹했고, 결과는 늘 파멸이었다. 또 인간이 망친 황무지를 다시 푸르게 바꾸는 건 희망이었다. 하지만 매번 비슷한 모습의 멸망과 소생을 반복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지구를 지켜라!>와 <부고니아>는 시대를 초월한 이 악마적 순환을 꼬집으며 그 끝을 비춘다. 다만 후자의 표현 방식이 좀 더 트렌디하다. 두 영화 사이의 간격은 고작 20여 년. <부고니아>는 그 사이 뚜렷이 가시화한 신념들과 그로 인한 분열을 다루며 주제의식을 강화한다. 인류 역사의 어떤 보편성을 동시대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특수한 시대의 단면들을 가져온 것이다.


<부고니아>가 <지구를 지켜라!>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 소재는 꿀벌과 벌집이다. 영화는 가장 섬세하고 연약한 존재들로부터 생명이 탄생한다는 증거로 꽃에서 꽃으로 이동하는 꿀벌의 모습을 비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꿀을 채집한 일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벌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벌이 없는 벌집은 전멸하게 된다. 이 '군집붕괴현상(Colony Collapse Disorder, CCD)'는 기후위기의 대표적인 증거로 거론된다.



<부고니아>의 테디(제시 플레먼스)는 이를 '일벌의 탈주'라 명명한다. 그는 군집의 일벌, 그리고 인간 사회의 자신이 겪는 고통에는 배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배후가 일벌과 테디의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하게 하거나, 파괴했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복잡한 시대에 고통의 원인을 찾을 도리가 없다. 배후인 외계인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 테디는 조력자인 사촌 돈(에이든 델비스)과 함께 '정신의 찌꺼기'라 부르고 있는 모든 욕구를 거세하려 한다. 뇌세포가 깨끗하지 않으면 '놈들'에게 지배당하기 십상이라서다. 테디가 이 모든 정보를 얻고 조합한 건 유튜브를 통해서다. 어디서 비슷한 소리를 들어 본 것 같다면 우연이 아니다. 그는 '반향실(echo chamber)'에 갇힌 채 사회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테디에겐 과학도 통계도 거짓이다. 그의 머릿속 골방에선 둥글던 지구도 점점 평평하게 변화한다.



한편 테디 일당이 배후로 지목한 건 거대 바이오 기업의 CEO 미셸(엠마 스톤). 모든 욕구들을 충족하며 사는 인물이자 지역 경제에 이바지하는 역군이다. 동시에 테디의 엄마를 병들게 한 원흉이기도 하다. 군집의 여왕벌 같은 존재지만 새 시대에 맞춰 입으로는 '다양성'을 주워 섬긴다. 그의 행동에서 다양성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사회의 위선이 폭로된다. 무조건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달콤한 생색의 뒤엔 'Up to you', 모든 책임을 개인이 진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 생색에 속은 신념들은 옳고 그름의 기준을 잃은 채 목소리 데시벨만 높아지며 사회는 일벌이 탈주한 군집처럼 분열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다양성'은 있어도 결국 '존중'까진 바랄 순 없다. 이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시대정신을 담은 대목이 <부고니아>와 <지구를 지켜라!>를 구분하는 선 중 하나다.


<지구를 지켜라!>는 다른 인간을 학대하고 즐기기까지 하는 인간의 잔인함에 방점을 찍고 윤리적 의문을 던졌다. <부고니아>에서는 같은 종을 괴롭히다 못해 숙주인 지구까지 파괴하며 결국 자살의 형태로 멸망하려는 인류에 대한 경계심이 원작보다 더 강조됐다. 제목의 뜻은 소의 시체에서 꿀벌이 생긴다고 믿으며 행했던 고대 의식인데, 왜 이를 차용했는지는 결말에서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부고니아>와 <지구를 지켜라!>의 마무리에는 미세하지만 매우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기후위기는 거짓"이라며 파리협정을 탈퇴하는 세계 패권국의 대통령은 지금 실존한다. 이런 시대에 영화 속 월식에 맞춰 길게 펼쳐져 가는 지구를 보니 '지구는 회전타원체'라는 명제의 참과 거짓마저 의심스러워지는 지경이다. 밝혀진 진실들도 거짓 같다는 불신, 거짓도 진실일 수 있다는 확신, 그조차 희미해져 생각을 그만하고 싶어지는 혼란의 타임라인을 <부고니아>에서 만끽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공개된 이미지 상으로는 엠마 스톤의 삭발이 돋보이지만, 제시 플레먼스의 광기는 그보다 훨씬 끔찍하고 처량하다. 11월 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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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라효진
  • 사진 CJ E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