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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궁의 낭만

파리 올림픽의 짜릿한 순간들.

프로필 by 라효진 2024.08.04
2024 파리 올림픽에 나선 한국 대표팀의 당초 목표는 금메달 5개 획득이었습니다. 여자 핸드볼을 제외한 단체 구기 종목에서 충격의 예선 탈락이 이어진 탓에, 선수단 규모가 크게 축소된 것도 소박한(?) 목표의 배경입니다. 그러나 올림픽이 절반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이미 한국 대표팀이 딴 금메달은 9개입니다. 종합 순위에서 일본과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죠.


뜻밖의 종목에서 역대 최고의 기록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우리 선수단이 안정적으로 메달을 수확하는 종목은 역시 양궁입니다.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래 세계 양궁의 정상에는 한국이 있었어요. 한국 양궁 선수들이 당긴 시위를 놓기 전의 고요함에는 긴장감 이상의 신뢰감이 존재합니다.

올림픽보다 어렵다는 한국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대표팀으로 뽑힌 건 남자 김우진, 이우석, 김제덕과 여자 전훈영, 임시현, 남수현입니다. 한국 양궁의 낭만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요. 선수 개인이 쌓은 이전의 커리어가 어떻든 선발전의 결과로만 국가대표를 정합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여자 대표였던 최현주는 줄곧 '한국의 약점'으로 지목됐지만 단체전 결승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우승에 기여했어요. '공정'이라는 스포츠 정신이 만들어낸 감동의 성장 서사였죠.


파리 올림픽에서도 이 같은 선발전을 거친 선수들은 랭킹 라운드부터 무난하게(?) 고득점을 냈습니다. 가장 먼저 열린 결승전은 7월29일(이하 한국시각) 여자 단체전이었는데요. 전훈영, 임시현, 남수현이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양궁 여자 대표팀이 획득한 10번째 올림픽 금메달이기도 해요. 말이 10회 연속이지,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단 한 번도 다른 나라에 1등을 내 준 적이 없는 거예요.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이어진 결승전은 다음날인 30일 남자 단체전이었습니다. 지난 2020 도쿄 올림픽에 이어 다시 단체전 결승에 선 김우진, 김제덕과 달리 이우석은 이번이 무려 3수 끝에 출전하게 된 첫 올림픽이었어요. 그는 2016 리우 올림픽 선발전에서 4위를 기록해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습니다. 이후 2020 도쿄 올림픽 국가대표가 됐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회가 연기되는 바람에 다시 열린 선발전에선 기회를 놓치게 됐어요.


이윽고 입대한 이우석은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상무 소속으로 출전했고, 결승전에서 김우진과 맞붙어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금메달을 땄다면 조기전역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했죠. 하지만 이 지독한(?) 운명을 딛고 파리로 간 이우석은 단체전 결승에서 만점을 기록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 대표팀은 남자 단체전 올림픽 3연패를 달성하게 됐고요.


이우석의 양궁 인생이 드라마틱했다면, 김우진은 다큐멘터리처럼 잔잔했습니다. 물론 보는 사람에게만 그렇겠지만요. 2014년부터 2024년까지 한국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전부 우승을 차지한 '절대자'가 김우진입니다. 시종일관 무표정과 일정한 심박수를 유지하며 '수면쿵야'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그죠. '예천읍이 키운' 소년궁사 김제덕도 어엿한 성인이 돼서 더 나아진 기량을 뽐냈는데요. 특유의 우렁찬 "파이팅"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만 개인전 도중에 심판에게 한 번 주의를 받긴 했지만요.

이번달 2일엔 혼성 단체 결승전이 있었습니다. 김우진과 임시현이 나선 경기에서 한국이 독일을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어요. 여유롭게 거머쥔 우승이라 그런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한국 양궁이 강한 이유를 묻는 기자도 있었습니다. 이에 김우진은 "한국 양궁은 체계가 확실하고, 공정한 대한 양궁협회가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선수와 협회 사이에는 대체적으로 갈등만 볼 수 있었지만, 양궁에서는 이런 낭만도 있네요.


3일에는 여자 개인전이 열렸어요. 한국 대표팀 3인이 모두 메달권에 진입한 상태에서, 임시현과 남수현이 금메달 결정전을 벌였습니다. 전훈영은 튀르키예의 리사 바벨린과 동메달 결정전을 치렀고요. 그 결과 임시현이 금메달을 따며 이번 올림픽 3관왕에 올랐습니다. 자동으로 남수현은 은메달을 거머쥐었어요. 전훈영은 아쉽게 4위에 머물렀습니다. 개인전 상위 4인 안에 대한민국 선수가 무려 3인이나 있는 거예요. 특히 임시현은 항저우와 파리에서 모두 개인-단체-혼성 금메달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이제 남은 건 4일 남자 개인전 뿐이군요.

'주몽의 후예'임을 입증하듯, 한국 대표팀은 압도적 성적을 보여 주며 세계의 주목을 받는 중입니다. 다만 낭만적인 건 한국 양궁만이 아니었는데요. 남자 개인전 64강에서 김우진과 맞붙은 차드 국가대표, 이스라엘 마다예 선수의 이야기가 눈에 띕니다. 그는 지난달 30일 경기에서 마지막 화살로 1점을 맞혔어요. 국가대항전에서 쉽사리 볼 수 없는 광경이었죠.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차드에서 출전한 마다예는 세계 랭킹 201위로 2008년부터 양궁을 독학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감독 이하 스태프는 커녕 가슴 보호대도 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마침내 파리 올림픽 출전권을 얻은 선수죠. 이 멋진 선수는 경기 후 "유튜브에서 한국 선수들을 보며 연습했다"라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스폰서가 없어 장비를 전부 자비로 구입했지만 꿈을 좇아 세계 무대에 데뷔한 그의 올림픽 정신이 빛났습니다.

Credit

  • 에디터 라효진
  • 사진 GettyImages·각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