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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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마주한 그 순간, 나의 일부가 된 문화적 경험들.

프로필 by 이경진 2024.06.18

강하라•<에포크한남> 편집인

BOOK<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스콧 니어링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할 때 지식인의 삶이란 ‘지식’이 아니라 ‘지혜’에 방점이 있음을 깨닫게 한 책이다. 니어링 부부는 자연 속에서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읽고, 쓰고, 젊은이들을 가르치며 일생을 보냈다. 비록 도시에 살고 있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삶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됐다.
ART ‘디너파티’, 주디 시카고 뉴욕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만난 주디 시카고(Judy Chicago)의 ‘디너파티(The Dinner Party)’(1979)는 내게 용기를 알려준 작품이다. 1970~1980년대 미술계에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큰 이슈가 된 대규모 설치미술 작품으로, 주디 시카고는 여성의 몸에 대한 편견과 남성 위주의 사고, 여성에게 주어진 사회적 제약에 대항했다. 덕분에 미술과 문학, 정치 분야에서 거대한 물결로 기억되는 여성의 저항이 있을 때마다 여성에게 주어진 제약의 범주가 조금씩 허물어졌다. 전통과 규범 밖에서 목소리를 내는 예술가들, 그들이 매력적인 언어로 치환한 메시지 속에는 우아하고 힘 있는 용기가 담겨 있다.
MOVIE<한나 아렌트> 철학자면서 정치사상가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 영화. 영화는 누군가의 행동이 그의 동기나 목적과 관계없이 악해질 수 있고,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화·정치의 영향이 크다는 걸 보여준다. 나쁜 의도를 품지 않아도, 주변의 선한 사람들이 당연하고 평범하다고 여기며 행하는 일 중에서 무언가는 악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사유하지 않는 것이 결과적으로 악의 진부함을 낳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많은 것에 순종하며 살고 ‘왜’를 떠올리지 않는 문화에서 개인의 주권과 사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TRAVEL 하와이 관광객으로 넘치는 호놀룰루를 벗어나 마우이와 빅아일랜드, 카우아이 섬을 다니면서 봤던 섬 주민들의 삶은 한 가지로 귀결됐다. 따뜻한 기후와 풍요로운 자연환경이라면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일상이 지치고 답답할 때마다 하와이의 대자연을 떠올리며 그때의 추억을 곱씹는다. 문화적 유산이 풍부한 유럽 도시에서도 좋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존재론적 나를 느낄 수 있는 하와이가 최고였다.

전현지•이악크래프트 대표

MEDIA <FM 음악도시> 내 오감 중 시각 다음으로 발달한 게 청각인 것 같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가곡이나 팝 CD를 크게 틀어 주말에 늦잠 자는 나와 동생을 깨웠고, 매일 저녁 미술학원으로 가는 아버지의 카오디오에서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시그널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바쁜 부모님 대신 매일 밤 내 옆을 지켜준 건 MBC <FM 음악도시>였다. 취향이 분명하지 않았던 10대 시절, 혼자 책상 또는 이젤 앞에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뮤지션들의 작업 이야기, 그들이 추천하는 음악, 각지에서 날아온 사연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
SCENT무화과 스무 살, 멜버른으로 여행 갔을 때 해변 앞 작은 선물 가게에서 만난 ‘카이(Kai)’ 보디로션에서 처음으로 무화과 향을 접했다. 향 자체도 좋았지만 피그(Fig)라는 단어도 예쁘게 다가왔다. 그 시절엔 국내에서 무화과 향을 구하기 어려워 여행지에서 무화과 향만 보면 어김없이 지갑을 열었다. 덕분에 얼굴을 가꾸는 화장품 또는 향수보다 보디 제품에 더 많은 호기심이 생기고 컬렉팅하는 습관이 생겼다. 패션에만 편향되지 않고 음식부터 사소한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고르게 가꾸는 법을 깨달았다.
DRINK ‘비노 아란치오네’, 루시 마고 여러 도시를 여행하고 새로운 것을 충분히 접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연히 찾아온 오렌지 와인 덕분에 세상은 여전히 새롭고 호기심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홍콩에서 사온 비노 아란치오네(Vino Arancione)를 처음 마신 날, 오렌지 와인이 오렌지로 만든 와인을 일컫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후로 와인 앤 다인(Wine & Dine)을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해 30대 미식생활이 더 다채로워졌다.

김정현•하인사이트크리에이티브코리아 그래픽 디자이너

ARTIST왕가위 중·고등학생 때 일본영화와 홍콩영화에 빠져 있었다. 당시 내 영화 취향의 양대산맥을 차지한 인물은 바로 이와이 슌지와 왕가위 감독. 특히 왕가위에 대한 관심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거듭해서 볼수록 느껴지는 새로운 감정, 지금 봐도 세련된 미장센, 거짓말처럼 만우절에 떠난 장국영, 절대적 아름다움을 지닌 화면 속 장만옥, 왕가위의 영원한 페르소나 양조위. 그의 영화를 재개봉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어김없이 영화관으로 향한다.
ART ‘키스’, 구스타프 클림트 21세에 떠난 유럽 여행 중 우연히 오스트리아 빈에 잠깐 들른 적 있다. 계획에 없던 선택이었고 별다른 정보도 없었다. 큰 기대 없이 찾아간 벨베데레 궁전 전시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만났다. 작품을 보고 받은 충격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머릿속에 선명하다. 책 또는 화면에서 표현되지 못했던 컬러와 크기가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였다. 무엇이든 실제로 보고 느끼기로 결심한 것은.
MOVIE<냉정과 열정 사이> 한 이야기를 남녀의 관점으로 써 내려간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를 군 복무 시절 흥미롭게 읽었다. 소설에서 받은 감동은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졌다. 영상 속의 피렌체에 온 마음을 섭렵당했고, 두오모 대성당에 대한 판타지는 더욱 커졌다. 급기야 신혼여행지로 선정한 피렌체. 수많은 계단을 지나 힘겹게 올라간 끝에 당도한 대성당 옥상에서 마음껏 사랑을 외쳤다.
EVENT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20대 때 모 브랜드의 서포터즈로 참여한 ‘2008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짧지만 길었던 3일은 첫 페스티벌 경험이자 각종 공연에 눈뜨게 만들었다. 내 청춘의 가장 진한 페이지였다. 이후 동종 업계에서 일하기도 했고, 함께 공연을 즐기던 친구들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은 아이와 함께 페스티벌 개최지로 향하며 인생의 또 다른 페이지를 채워나가고 있다. 올해도 아이와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 갈 예정이다.


검은색 ‘라운드 베이스’와 부드러운 모래색의 ‘자 베이스’는 모두 NR Ceramics by Chapter 1.

검은색 ‘라운드 베이스’와 부드러운 모래색의 ‘자 베이스’는 모두 NR Ceramics by Chapter 1.


고예림•작사가

MEDIA <나의 해방일지> 짙은 여름 풍경과 대비되는 시린 겨울까지 빈틈없는 묘사와 서사로 정신없이 사람을 감았던 한 권의 문학작품 같은 드라마. 이상한 단어지만 대체 불가능한 단어 ‘추앙’.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가 원하는 대로 자신을 억지로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해방으로 걸어가는 과정을 보며 위안을 받았다.
PLACE 전 세계의 슈퍼마켓 여행하면서 랜드마크에 갈 바엔 슈퍼마켓을 한 군데 더 가보겠다는 다짐을 한다. 낯선 색 조합과 이미지, 패턴이 그려진 각양각색의 패키지는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해도 황홀해진다. 낯선 언어로 적힌 모든 제품은 내가 써보지 않은 것투성이다. 그래서 작은 도전 정신으로 스낵이나 초콜릿을 구매해 맛보고, 제일 입맛에 맞는 걸 선물로 구입하는 여행 루틴은 나만의 리프레시 방법이다!
MUSIC ‘나만의 방식’, 권진아 ‘나의 모양’대로 산다는 것에 대해 포기하지 말자고, 나를 좀 더 믿어보라고 말해 주고 싶을 때마다 듣는 곡.

전새나•패션 디자이너

MUSIC <뮤직 포 사이키델릭 테라피>, 존 홉킨스 코로나19로 작업도 힘들고 몸과 마음이 무겁던 시기에 큰 도움이 됐던 존 홉킨스의 2021년 앨범 <뮤직 포 사이키델릭 테라피 Music for Psychedelic Therapy>. 마음의 정화가 필요할 때 이 앨범의 모든 트랙을 순서대로 들으며 혼자 동네 숲을 걷는다. 마지막 트랙 ‘싯 어라운드 더 파이어(Sit around the fire)’를 들을 때면 사방이 트여 있고 빛이 내리는 곳으로 가 눈을 감고 명상하듯 듣고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난다.
BOOK 니체, 쇼펜하우어, 카뮈의 책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세상 앞에 한없이 작은 존재로 무너져버릴 것 같을 때가 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일어나는 것도 버거울 때 니체나 쇼펜하우어, 카뮈의 글을 찾아 읽고 명상한다. 서로 다른 방식과 논조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 세상을 대하는 나의 의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존경하고 애정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 빛을 빈틈없이 쬐다 보면 다시 마음이 건강해져 나아갈 힘을 얻곤 한다.
MOIVE 에릭 로메르의 영화 감성을 환기하고 싶을 때 찾는 1순위 선택지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다. 일상적이지만 다분히 영화적으로 아름다운 영상,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대화, 평범하지만 우리와 닮은 캐릭터들, 그들의 옷매무새나 매너. 모두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정서다. 7년 전 크리스마스에 영화 전집을 선물받은 이후 힐링이 필요하면 해당 계절과 그날의 무드에 따라 그의 영화를 골라본다.

서윤정•작가

CITY 런던 미국에서 학부를 마치고 석사 과정을 위해 2년간 런던 생활을 했다. 이때의 경험이 내 작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돌이켜보면 학교보다 ‘런던’이라는 도시에서 더 많은 걸 배웠다. 런던의 세련된 색채와 넓고 단단한 예술, 다양한 문화적 스펙트럼 그리고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나에게 삶의 형태와 작업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깨닫게 해준 매개체였다.
SCHOOL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중학교 때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처음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 후 유학을 결심하고 뉴욕에 있는 디자인 스쿨에 입학하기 위해 준비하다가 우연히 시카고 여행에서 방문했던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Art Institute of Chicago)’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미국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가 그린 플라워 페인팅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난다. 매일 ‘이 뮤지엄에 속한 예술 학교에 다니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반드시 이곳에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를 계기로 패션 디자인이 아닌 순수미술을 전공하게 됐고, 4년 동안 황홀할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학교생활을 했다.
MUSIC 마리아 칼라스의 음악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는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다. 성악가인 그녀의 음악을 어릴 때부터 들은 터라 세뇌당하듯 마리아 칼라스가 최고의 가수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부른 곡은 모두 익숙하게 다가왔고, 자연스럽게 오페라에 관심이 생겼다. 그 후 음악 스펙트럼이 점점 넓어졌고, 칼라스의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1993년에 선보인 ‘라 디비나(La Divina)’다. 아빠 차를 타면 늘 이 앨범이 재생됐다. 그중에서도 글럭(Gluck)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중 3막 ‘에우리디체 없이 무엇을 할까’라는 곡을 정말 좋아한다.

송슬기•‘오베르’ 플로리스트

MUSIC 올라퍼 아르날즈와 닐스 프람 현실의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올라퍼 아르날즈(O′lafur Arnalds)와 닐스 프람(Nils Frahm)의 음악을 듣곤 했다. 특히 올라퍼의 음악은 언제 어디서든 차가운 새벽 같은 곳으로 데려갔다. 명상하듯 두 눈을 감고 때로는 꽃 작업을 할 때 종종 들으며 힘든 마음을 달랬고, 부침의 시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음악들.
BOOK <불안의 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깨닫게 된 책. 알 수 없는 불안이 찾아올 때마다 이 책에 매달렸고, 많은 위로를 얻었다. 꽤 두꺼운 책인데, 마지막 장은 다시 불안이 찾아왔을 때를 위해 남겨뒀다.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다.
BOOK 자크 라캉의 철학서 나를 알고 나아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사고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사고를 읽을 수 있었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무의식 관련 세미나 책이었는데, 무의식은 어떻게든 표출된다고 한다. 무의식은 우리가 의식하는 순간 더 이상 무의식이 아니라는 라캉의 분석이 새로웠고, 꽃을 꽂을 때 역시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내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 깨달음은 꽃 수업을 진행할 때도 영감을 준다. 안정적인 꽃 장식을 구사하는 수강생들의 삶은 전반적으로 안정된 형태이고, ‘위태로운’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이들은 꽃도 아슬아슬하게 꽂는다. 내가 사람들이 꽂은 꽃 장식을 보며 그들을 이해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자신을 돌아보고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병엽•바이아키텍쳐 대표

TRAVEL 히말라야 20대 말에 홀로 떠난 히말라야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외감과 인간 존재, 사랑에 대한 가치관에 눈뜨게 해주었다. 비슷한 루트로 등반한 프랑스 커플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기 몸집만 한 배낭을 메고 따로 출발했다. 도착지에서 만나자는 약속만 하고 각자의 속도대로 등반하는 뒷모습에서 서로의 속도와 시간에 대한 존중이 느껴졌다. 내가 앞으로 추구할 사랑과 연인에 대한 가치관이 형성된 순간이었다.
MUSIC ‘커넥션’, 잠비나이 잠비나이의 앨범 중 <차연>을 가장 좋아한다. 거기에 수록된 ‘커넥션(Connection)’이라는 곡은 발표된 지 10년이나 지났지만 내게는 여전히 유효한 환각제다. 빠르게 작업에 몰입해야 할 때 이 음악을 듣는다. 멜로디가 차곡차곡 쌓이고 반복되면서 곡이 진행되는데, 듣다 보면 방해하는 것들이 사라지고 반복과 차이가 만들어낸 진동 속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ART 마이클 헤이저 · 크리스토 자바체프의 대지 미술 20대 초반, 대지 미술가 마이클 헤이저(Michael Heizer)와 크리스토 자바체프(Christo Javacheff)의 작업에 깊이 빠졌다. 그들의 작품은 건축이 생각 이상으로 훨씬 넓은 영역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형태를 스스로 드러내는 건축이 아닌, 대지적 차원에서 건축을 다루고 싶다는 욕망을 심어줬다. ARTIST 세잔 · 베이컨 10대 시절 아무 이유 없이 양자역학에 빠져든 나는 20대 때 세잔과 베이컨의 그림에 매료됐다. ‘이게 양자역학이야’라는 듯 특별한 이유 없이 자연스럽게 말이다. 곧이어 메를로 퐁티와 사르트르에 관심이 생겼고, 최근엔 원효대사의 책을 들여다본다. 지금도 그들의 영향 아래에 있다.



김예빈•갤러리 모순 대표

TRAVEL 오스트리아 20대 때 서유럽으로 두 달 정도 배낭여행을 간 적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에서 수많은 갤러리와 공연을 보며 많은 영감을 받았다. 평일 오후 점심, 우연히 찾은 소규모 오케스트라 공연장에는 편한 복장을 한 노년 관객들로 가득했다. 특별한 기념일이나 유명 연주자의 공연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느긋하게 공연을 즐기는 문화가 인상 깊었다. 일하거나 여가를 즐길 때 사소한 순간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오랜 습관 역시 이 여행이 계기가 됐다.
PLACE 소호 팜하우스 <매거진 B>에서 브랜드 마케터로 재직하던 시절, 소호 하우스 취재를 위해 영국을 방문했다. 운 좋게 영국에 있는 모든 소호 하우스 공간을 둘러보고 팜 하우스에도 이틀 정도 머물 기회를 얻었다. 런던에서 차로 두 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마을. 한적하고 목가적인 시골을 배경으로 우아하고 럭셔리한 레지던시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인접한 정원에서 공수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이 레스토랑에서 서빙됐고, 호수와 연결된 수영장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한국에도 하루빨리 소호 하우스가 생기길 바란다.
MEDIA <인 레지던스> 글로벌 미디어 나우니스(Nowness)에서 발행하는 영상 시리즈 <인 레지던스 In Residence)>를 100번 이상 본 것 같다. 전 세계에 이렇게 아름다운 집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개성 넘치는 이들이 자신의 공간을 어떤 방식으로 꾸미고 공예와 미술품을 배치하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특히 좋아하는 영상은 마티아 보네티(Mattia Bonetti)의 별장. 6년 전 영상이지만 종종 영감을 얻는다. 수영을 좋아해 호수 앞에 집 짓고 매일 아침 수영하는 일상, 자연이 둘러싸고 있는 집에 좋아하는 아트워크와 오브제를 두고 생활하는 모습은 이상적인 집에 대한 꿈을 품게 만든다.

홍기웅•사진가

ARTIST 데이비드 린치 사진을 전공하고 사진가가 되기까지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다. 그중 첫 번째 변화를 가져다준 사람은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였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Mulholland Drive> <로스트 하이웨이 Lost Highway>를 좋아했는데, 고속도로가 펼쳐지는 첫 장면을 비롯해 그의 영화 속 요소들은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내 사진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데이비드 린치가 색을 다루는 방식, 감정적이면서도 상징적인 표현, 시각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풍부한 영화 속 장치들은 내 작업의 주요 참조점이 됐다.
MUSIC ‘신주쿠 트와일라잇’, 에디 히긴스 트리오 졸업 후 백수로 지냈던 시기, 위로가 돼준 순간엔 어김없이 에디 히긴스(Eddie Higgins)의 음악이 있었다. 늦은 밤 어머니 차를 타고 나가 친구와 함께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한 다음 ‘신주쿠 트와일라잇(Shinjuku Twilight)’을 무한 반복하며 드라이브를 즐겼다. 보통의 재즈에선 느낄 수 없는 동양적 감성이 느껴지는데, 지금처럼 마음껏 여행을 갈 수 없었던 나에게 도쿄에서 보낸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게 해줬다.
TRAVEL 파리 나이가 들수록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지만, 반대로 혼자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든다. 30대 후반, 혼자 파리로 여행을 떠났다. 밤 10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허기진 배를 채우러 나섰다. 마레 지구에 있는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았는데 마침 영업 중인 작은 레스토랑이 눈에 띄었다. 술 취한 사람 틈에서 혼자 식사를 하며 와인을 마시던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당시 느낀 쓸쓸함과 고독이 싫지 않았다. 혼자 시간을 보내며 외로움과 마주할 때 삶에 새로운 관점이 찾아와 창의적인 표현과 내면의 성장을 증폭시키는 것 같다.

김진식•디자이너

SPACE 네덜란드 콘세르트헤바우 공연장 BMW가 주최하는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였다. 로테르담에서 열린 워크숍이 끝난 후 클래식을 좋아하는 아내를 따라 암스테르담으로 건너와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게 됐다. 유럽에서도 최고의 공연장으로 손꼽히는 콘세르트헤바우 공연장에 들어선 순간, 곧바로 1800년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곳곳에 놓인 꽃 장식, 투박하고 촌스러운 직물 장식은 솔직하고 꾸밈없어 오히려 좋았다. 오래된 공간에서 오래된 방식으로 듣는 클래식 연주는 눈의 감각에 치중하며 살았던 나에게 청각, 촉각 등 나머지 감각을 일깨워줬다.
BOOK <건축과 감각> 아이가 태어난 후 3년간은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나’ 중심에서 ‘사회’로 관심사가 확장됐으니 말이다. 작업도 개인 컬렉션 중심에서 일상적으로 쓰기 좋은 물건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는데, 유하니 팔라스마의 <건축과 감각>이다. 공간에 관심이 많아 건축 서적을 두루 읽던 중에 알게 됐는데, 인생 책으로 꼽을 만큼 명작이다. 건축과 공간에 대한 놀라운 접근과 해석이 사물과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확장해 주었다.
OBJECT 어린 시절 살았던 시골집의 중문 사물의 조형감을 연구하다 보면 어린 시절 느꼈던 감각이 떠오른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 중문이 있었는데, 대문이나 집의 모습은 현대화됐지만 중문만큼은 한옥 그대로였다. 옛것과 새것이 정돈되지 않은 채 뒤섞였던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문과 문 사이를 넘나들고 공간의 미묘한 변화를 느꼈던 순간들 역시 선명하게 남아 있다.

맹주희•슈퍼소닉 스튜디오 대표

TRAVEL 덴마크 코펜하겐 ‘행복 투어’ 해외여행 중 에어비앤비 체험 프로그램을 즐겨 활용한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현지인처럼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달리며 ‘덴마크인들의 행복’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는 우리가 운영하는 인디음악 프로젝트 ‘인디스 모먼트(Indie’s Moment)’의 토대가 됐다.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쉽고 즐거운 형태로 전달하려는 고민이 인디 음악가들의 삶을 중심으로 음악을 소개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MUSIC ‘원더월’, 오아시스 대학시절부터 좋아했던 밴드 오아시스는 음반사에 첫발을 내딛게 만들었다. 당시 소니에서 오아시스를 유통하고 있었고, 나는 많은 음반사 중에서도 소니에서 일했다. 지금은 퇴사했지만 2년 전 ‘ABC Zine Project’를 시작하면서 처음 만든 팬진 <When did I first get obsessed with OASIS>에 대학시절 기타를 배워 ‘원더월(Wonde rwall)’을 공연했던 내 모습을 담기도 했다.
EVENT ‘오프프린트 런던 2019’ 런던의 테이트 모던에서 개최되는 아트 북 페어 ‘오프프린트 런던(Offprint London 2019)’에서 독립 출판물을 접했다. 그 경험은 슈퍼소닉 스튜디오의 첫 번째 활동인 독립 출판물 <유러피안 에코백 아카이브> 발간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당시 전 세계에서 모인 아트 북의 인상이 강렬히 남아 책을 만드는 내내 심미적인 부분에 신경 썼다. 덕분에 그 책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책방에 입고시킬 수 있었다.

Credit

  • 에디터 이경진·권아름·윤정훈
  • 사진가 장승원
  • 아트 디자이너 김려은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