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피에르 폴랑, 곡선의 예술

과거와 미래를 품은 피에르 폴랑의 곡선 예술.

프로필 by 권아름 2024.05.27
‘Dunes and the tatamis'피스로 모래 언덕의 풍경을 연출한 전시 공간.

‘Dunes and the tatamis'피스로 모래 언덕의 풍경을 연출한 전시 공간.

미술관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조형미. 가구보다는 예술품에 가까워 보인다. 과연 앉아도 되는 걸까? 조심스럽게 몸을 내리다 의자에 닿는 순간, 자연스레 편안한 자세로 앉게 된다. 마치 의자에 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것처럼 말이다. 가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아온 프랑스 거장 디자이너 피에르 폴랑(Pierre Paulin)의 작품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혁신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폴랑은 인간의 몸이 지닌 형상을 포용하는 기능적인 조각품을 창조해낸 디자이너다. 그 바탕에는 조각가가 되고자 훈련했던 그의 미학적 사고가 깊게 뿌리내렸다.

아티스트 컴퍼니 1층에는 'F572'와 'Tongue' 의자 등 피에르 폴랑의 아이코닉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아티스트 컴퍼니 1층에는 'F572'와 'Tongue' 의자 등 피에르 폴랑의 아이코닉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당시 저명한 이탈리아 가구 디자인에 대적하는 프랑스 대표 디자이너로서 피에르 폴랑이 이룬 가구계의 혁신은 대단했다. 저지와 같은 신축성 있는 소재를 사용해 유려한 곡선을 지닌 가구 디자인을 구현했다. 1970년에는 프랑스 엘리제궁 내 퐁피두 대통령의 개인 공간을 장식했고, 파리 시청의 태피스트리 홀 등 굵직한 포트폴리오를 거듭 쌓았다. 2009년 타계한 피에르 폴랑의 가구는 리네노제, 구비, 아티포트 등 다양한 가구 브랜드에서 출시되고 있으며, 그의 디자인 유산은 작품과 관련한 전시, 출판, 프로덕션을 선보이는 가족 프로젝트 ‘폴랑 폴랑 폴랑(Paulin Paulin Paulin)’을 통해 동시대에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타타미의 기하학과 카펫의 유연성을 결합한 'Tapis-Siège'.

타타미의 기하학과 카펫의 유연성을 결합한 'Tapis-Siège'.

얼마 전, 폴랑 폴랑 폴랑은 피에르 폴랑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국내 첫 전시 <스타링 – 피에르 폴랑(Starring – Pierre Paulin)>을 열었다. 독특하게도 배우 이정재와 함께 ‘디자인과 영화’라는 컨셉트로 1960년대 미디어 속에 노출된 폴랑의 가구 작품들을 스크린에서 꺼내 놓았다. 9월 8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에선 폴랑의 아이코닉한 제품은 물론 그동안 쉽게 보지 못한 미공개 작품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다. 피에르 폴랑의 예술과 기능을 융합하고 개인을 포용한 디자인, 형태에 대한 거침없는 탐구가 여전히 모두의 감각을 사로잡을 것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피에르 폴랑의 아들, ‘폴랑 폴랑 폴랑’을 이끌고 있는 벤자민 폴랑(Benjamin Paulin)과 만나 자세한 대화를 나눴다.
'Alpha Club' 의자 뒤에 서서 생각하는 듯한 포즈를 잡은 유쾌한 벤자민 폴랑.

'Alpha Club' 의자 뒤에 서서 생각하는 듯한 포즈를 잡은 유쾌한 벤자민 폴랑.

배우 이정재가 협력한 전시다. 어떤 인연으로 그와 함께 전시를 열게 됐나
피에르 폴랑은 오래 전부터 한국 여행을 통해 많은 영감을 얻어왔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한국을 방문한 기억이 난다. 최근 여행한 서울은 지난 과거와 비교했을 때 많은 것이 변했더라. 역동적이고 새로운 것을 수용하고 응용하는 이 도시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첫 전시로 특별하고 흥미로운 기획을 구상하던 중에 이정재 배우와의 협업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현대미술과 디자인 애호가이자 피에르 폴랑의 오랜 팬으로,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다. 이번 전시의 조력자로 자신의 공간인 아티스트 컴퍼니로 초대해주었고 특별한 전시를 열 수 있었다.

미디어에 단긴 피에르 폴랑의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 목적과 콘셉트에 관해 자세히 들려준다면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이정재와 함께 여는 특별한 전시의 매개체를 고민하던 중 발굴한 키워드가 ‘영화’다. 피에르 폴랑의 가구는 50년대부터 가상의 공간이 무대이거나 미래지향적인 영화에 자주 등장해왔다. ‘디자인과 영화’라는 컨셉으로 미디어 속에 녹아 있는 피에르 폴랑의 가구 작품을 선보이고, 예술적 감각을 전하고 싶었다. 전시장 1층에는 피에르 폴랑의 상징적인 의자들을 나열하고 지하는 누군가의 응접실 혹은 거실처럼 꾸몄다. 더 깊숙한 공간으로 들어서면 ‘듄스 앤 더 타타미스(Dunes and the tatamis)’ 제품이 장관을 이루는 ‘듄’방이 있다. 모든 곳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무엇보다 이 전시에서 관람객들이 가구에 앉아보고, 직접 경험해 보길 바란다.

영화를 비롯한 미디어 콘텐츠가 폴랑의 디자인에 러브 콜을 보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미디어에 등장한 자신의 작품에 대해 피에르 폴랑은 어떻게 언급하곤 했나
피에르 폴랑의 작품이 프랑스 디자인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가구 디자이너 최초로 신축성 있는 원단과 특수한 폼을 사용한 소재의 혁신과 유기적인 디자인에 있다. 당시 이러한 진보적인 성격의 제품은 대중들에게 가구보다는 조각품으로 여겨져 자신의 공간에 선뜻 두지 못했다. 대신 현실에서 보여줄 수 없는 장면이 필요한 영화에서 자주 등장했다. 자신의 작품이 미디어에 등장하는 일을 두고 피에르 폴랑이 특별한 피드백을 남긴 적은 없다. 물론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여기긴 했을 테지만, 그는 한 작품의 디자인이 완성되면 바로 다음 작품에 관해 생각하고 이에 전념하는 사람이었다. 혹 과거 디자인한 작품에 관해 언급하게 될 땐 부족했고 아쉬웠던 부분에 대해서만 말하곤 했다.

'Élysée' 조명 옆으로 벤자민 폴랑이 책을 보고 있다.

'Élysée' 조명 옆으로 벤자민 폴랑이 책을 보고 있다.

피에르 폴랑은 가구 디자인에 혁신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디자인과 철학을 전시를 통해 어떻게 보여주고자 했나
아버지의 작품이 뮤지엄에 박제되어 일상 속에서 잊히기 보다 계속해서 사람들의 삶에서 사용될 수 있길 바란다. ‘폴랑 폴랑 폴랑’ 프로젝트 역시 폴랑이 작품이 메아리처럼 퍼져 나가 세상에 울림을 주길 마음으로 시작했다. ‘폴랑 폴랑 폴랑’을 통해 진행하고 있는 모든 전시는 기능과 예술을 융합한 아버지의 디자인을 동시대의 실생활에 접목시키는 방식으로 공간을 연출한다. 어머니 마야 폴랑(MAÏA PAULIN), 나의 아내 앨리스 르모네(Alice Lemoine)를 비롯해 우리 가족 모두의 손길과 이야기, 아이디어를 접목해 피에르 폴랑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피에르 폴랑의 작품 중 당신 또는 가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피스는
물론 모두 특별하지만, 단 하나를 꼽자면 프랑스 대통령을 위해 탄생한 의자 ‘Fauteuil President’이다. 개인을 위해 만든 작품이기에 피에르 폴랑 모든 의자 중 가장 알려지지 않은 피스다. 육각형의 프랑스 지형에 대한 헌사를 담은 작품으로, 이 제품을 만들 당시 아버지 나이는 예순이 넘었다. 피에르 폴랑이 일생 동안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실험해온 디자인과 기술, 철학을 모두 함축한 디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든 면에서 공을 들였던 피스다.

‘폴랑, 폴랑, 폴랑’은 피에르 폴랑의 유산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그의 아카이브를 연구하는 가족 프로젝트다. 이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사고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 아버지의 별세가 큰 계기였다. 누구든지 부모를 잃는 것은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듬해 딸이 태어났다. 여러가지 변화가 살아생전 아버지가 해오던 디자인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관심을 가지고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생각을 하던 찰나, 패션디자이너 알라이아(Alaia)에서 폴랑 작품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제안해 왔었다. 그 기회로 아버지가 만든 유토피아적 상상을 현실에 내놓게 되었다. 피에르 폴랑은 수많은 프로젝트가 있었고, 거절 당한 아이디어도 꽤 있었다. 나는 사실 아버지가 만든 작품들을 집에서 모두 사용해 봤기에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작품이 더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상상력을 계속 세상에 내보이기 위해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하 1층 전시장에는 'Alpha' 소파와 'Rosace' 커피 테이블로 누군가의 응접실처럼 연출했다. 벽에는 이희준 작가의 작품이 걸려 있다.

지하 1층 전시장에는 'Alpha' 소파와 'Rosace' 커피 테이블로 누군가의 응접실처럼 연출했다. 벽에는 이희준 작가의 작품이 걸려 있다.

‘Dunes and the tatamis'에 누워 포즈를 취하는 벤자민 폴랑.

‘Dunes and the tatamis'에 누워 포즈를 취하는 벤자민 폴랑.

피에르 폴랑의 작품은 예술과 기능적 디자인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의 삶과 일상 가까이에서 함께한 아들로서 발견한, 피에르 폴랑의 오랜 호기심은 무엇이었을지
피에르 폴랑은 늘 새로운 기술을 찾는 사람이었다. 그와 동시에 오래된 전통 및 공예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기술에 접목하는 일에 집중했고, 동떨어진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것에 항상 관심을 두었다. 나의 관점에서 피에르 폴랑은 ‘크리에이터’라기보다 ‘발견자’였다. 항상 무엇인가를 더 향상시키기 위해 현대화하는 ‘모더나이저’였으며, 꿈꾸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항상 도전하고 자기 자신과 싸웠다. 수많은 의자를 디자인했지만 정작 자신은 앉아 쉬지 않고 늘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어떤 아버지였나
아버지는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렇듯 자아가 굉장히 강했다. 스스로에게 고집스럽고, 그만큼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집스럽게 행동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가족과의 마찰은 없었다. 다만 내가 공부를 포기하려고 했던 15살 시절, 아버지와 대립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내가 공부를 끝까지 마치길 바랐지만 나는 랩을 하고 싶어 결국 음악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내 음악을 듣고 좋아해주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하는 일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저 아버지로서 존재한 부분이 크다. 오히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그의 창의성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때서야 그가 남긴 여러 작품을 통해 아버지와 디자인에 관련한 대화를 나눈 것 같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국 첫 상륙,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피에르 폴랑의 가구를 만나러 와주기를!

Credit

  • 포토그래퍼 이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