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일치처럼 주변에서 공통의 주제를 가진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여기, 그 에피소드들이다. #1 30대 초반의 친구 A. 성실하게 공부해서 대기업에 입사해 밤낮없이 일해왔다. 별명은 야근. 취미는 쉬는 날 갤러리 순례하기. 평범하기 짝이 없다. 얼마 전엔, 사진이 첨부된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떤 사진가가 찍은 하와이의 야자수 사진이었다. 다시 들여다보니 A의 방 한편, 아니 방 한가운데다. 월급보다 비싼 작품일 텐데? “그냥 좋아서. 언젠가 한 번 본 이후로 늘 생각나더라고. 평범한 야자수 사진인데, 보는 것만으로 행복해지더라. 왠지는 나도 몰라. 근데 정신차려 보니까 내 손에 들어와 있더라고.” 그날 이후로도 A는 야근을 한다. 종종 야자수 사진이 나온 ‘집스타그램’을 포스팅하기도 하면서. #2 잡지사 편집장을 지내다가 돌연 아트 컨설팅 회사를 열며 갤러리스트가 된 50대의 B. 그녀는 L153아트의 이상정 대표다. 한 디자인 페어에서 우연히 메탈 보디의 디지털 사운드를 내는 2.3m 길이의 설치미술 작품을 보고 ‘한눈에 반해’ 그 자리에서 구입한 오래전을 기억한다. “옛날 철 다리미, 오토마트 오르골 같은 빈티지 물건들을 모으는 게 취미였어요. 아날로그 감성이 깃든 걸 좋아하는 편인데, 그 작품에 꽂힌 건 놀라운 사건이었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작품을 바라보면 설렌다고. 게다가 이사 갈 때마다 그 대형 작품을 위해 벽을 뚫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취재를 다니면서 느낀 거지만, 점점 많은 사람들이 ‘아트 피스 구입’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걸 알았다. 공간은 취향과 안목을 보여주는 좋은 장이고, 아트 피스는 매일 보면서 혼자 뿌듯해 할 수 있으며 집 안 분위기를 비일상적으로 바꿔주니까. 설령 집을 꾸밀 여유조차 없을지언정! 처음 내 집을 가진 신혼부부부터 작든 크든 내 공간을 갖고 있는 싱글 남녀까지 그림은 누구라도 살 수 있다. 문제는 스스로를 그림을 구입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마인드. 미술계 특유의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편 가르기 때문에 관심이 있어도 쉽게 접근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틈 사이로 이단아 같은 사람들이 튀어나오고 있다. 셀러브리티란 유명세 덕분에 파장도, 소문도 금세 퍼졌다. 세계적인 경매 전문 기업 소더비는 오는 10월 3일, 홍콩에서 빅뱅의 탑이 컬렉터로서 큐레이팅한 자선 경매 ‘#TTOP’를 진행한다. 탑은 틈날 때마다 옥션에 나온 현대미술 작품들을 살펴보고 가구 컬렉션을 하는 좀 특별한 셀럽이긴 하다. 또 영화감독 구스 반 산트와 영화배우 제임스 프랭코는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공동 작업한 수채화전을 열기도 했고, 힙합 뮤지션 카니예 웨스트는 뮤직비디오 ‘Famous’에 썼던 셀럽들의 나체 밀랍 인형으로 다시 한 번 블룸 & 포에 아트 갤러리에서 전시를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서울에서도 소위 뜨는 동네에 아트 피스를 살 수 있는 ‘힙’한 숍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남동 유엔빌리지 골목의 프린트 갤러리 ‘아티초크’는 F&B 컨설턴트 김아린 대표가 ‘일상의 작은 사치’란 컨셉트 아래 오픈한 곳으로, 당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 지역의 카페나 레스토랑들처럼 세련되고 캐주얼한 분위기에 도널드 저드나 줄리언 오피, 데미언 허스트와 같이 유명한 작가지만 너무 비싸서 소유할 수 없는 그림을 포스터와 판화로 판매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오래된 갤러리가 많은 삼청동에도 ‘프린트베이커리’라는 한정판 에디션 아트 숍이 생겼다. 빵집에서 빵을 고르듯 부담 없이 원하는 작품을 사자는 취지로 박서보, 김창열, 장욱진 등 국내외 유명 화백들의 그림이 걸렸다. 단색화 화가 중 한 명인 박서보 화백의 10호 사이즈 작품은 38만원 선. 액자도 크기별로 팔았다. 평소 그림 걸기를 꿈꾸던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원화를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는 리미티드 에디션 덕분이다. 여세를 몰아 삼청점을 리뉴얼하고, 한남 5거리의 독서당로 쪽엔 2호점을 오픈했다. 지난해 ‘어포더블 아트페어 서울’은 ‘젊은 애’들 천지였다. 전체 관람객 중 절반 가까운 수가 20~30대였고, 이 중 30%가 이 페어를 통해 첫 아트 피스를 구매했다. 50만~100만원대에서 국내외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살 수 있으니, 한 피스만 가지면 그 다음부터는 나도 컬렉터다. 컬렉터가 별건가? “요즘 생긴 아트 숍들의 특징은 오너의 취향에 따라 컬렉팅된 작품 위주의 숍들이 많아졌다는 거예요. 처음엔 동종 업종이 너무 많아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결국 각자의 취향을 보여주는 곳들이라 오히려 더 재미있더라고요.” 이태원 회나무 길에 있는 갤러리프리다의 김지현 대표는 안 팔리면 자신의 집에 기꺼이 걸 수 있는 작품들만 셀렉팅했다. 가장 뉴욕적인 화가 알렉스 카츠의 페인팅, 스페인의 조각가 안토니 타피에스의 리토그래피 프린팅, 설치미술 작가 브루스 나우먼의 네온 등 분명하고 강렬한 컨템퍼러리 작품 에디션들이다. 경리단 길에는 디자인그룹 엘리펀트가 운영하는 포스터 숍 ‘콜라쥬’가 있다. 빈지노가 속한 아티스트 그룹 IAB 스튜디오, 사진가 하시시 박, 일러스트레이터 나난 등 트렌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크리에이터들의 작품을 포스터 형태로 판매하는 곳이다. 가격도 4만~5만원대로 누구나 살 수 있다. ‘완판’된 작품은 일러스트레이터 김참새의 ‘Avec’. 화풍이 쉽고 귀여워서 그림이라곤 ‘1’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보고 있으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이다. 우리 집 거실에도 작품이 걸려 있다. 내셔널갤러리 기프트 숍에서 산 에드가 드가의 ‘발레 댄서’ 프린트 본이긴 하지만. 엽서만 사다가 처음으로 10호 크기를 샀다. 갤러리에서 감상할 땐 자세부터 좀 갖추게 되지만 이 복사본은 소파에 널브러져 멍하니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그 작은 평화를 떠올리면, 의자에 뿌리를 내린 듯 마감 중인 새벽에도 기분이 좋다. 내게도 작품과 더 강렬한 ‘케미’를 느끼는 날이 오면, 구매라는 용단을 내리는 순간이 올까? 이상정은 단호하지만 따뜻한 조언을 해 줬다. “올해 성과급을 받으면, 좀 더 큰 자취방으로 이사 가면, 신혼집 꾸미면, 애 다 크면…. 이런 생각 때문에 자꾸 순위에서 미루다 보면 평생 삭막하게 살게 돼요. 작품으로 투자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버리고요. 일단 마음을 뒤흔든 작품이 있다면 사세요.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작품을 봤을 때 ‘이걸 왜 샀나’ 싶을 정도로 취향이 바뀌었다면, 좋아할 만한 친구에게 주세요. 그 작품과 함께했던 시간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