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에 출생한
건축가 승효상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김수근 공간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며 마산 양덕성당, 경동교회 등의 설계에 참여했다. 1989년, 자신의 건축사무소인 이로재를 설립하면서 유홍준 교수의 집인 수졸당을 시작으로 수백당, 웰콤시티, 중곡동성당, 파주출판단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 사유원, 시안가족추모공원, 베이징 장성호텔 등 수많은 건축물을 설계했다. 1999년부터 시작된 파주출판도시 코디네이터, 2008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을 역임했으며 서울시 총괄건축가와 제5기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2019년까지 건축가로서 공공 역할까지 수행했다. 그가 추구하는 ‘빈자의 미학’은 동명의 책으로도 출간돼 많은 사람들에게 건축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으며, 빈자의 미학과 함께하는 그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승효상에게 건축이란 건축물이 세워지는 땅에 대한 이해와 예의를 갖추는 것, 자연이 가진 고유한 성정을 거스르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삶과 일상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는 그만의 서사로 공간의 모든 것을 천천히 확장해 나아간다.
얼마 전 건축 스케치를 모은 〈소울스케이프 Soulscape〉전을 열었습니다. 건축가의 스케치만 전시한 경우는 국내 최초입니다. 스케치를 하는 건 모든 예술가의 작업 수순이지만 특별히 건축가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건축은 사람이 살고 지내는 공간을 설계하는 것이니 수많은 스케치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저도 스케치할 때 많이 고민해요. 실제로 지어졌을 때 제대로 구현될 수 있을지, 실패하진 않을지, 사람이 공간을 사용할 때 불편하진 않을지 수없이 망설이고 걱정하죠.
삶은 신비로운 것이고, 그 삶을 담는 건축은 명료해야 합니다. 건축가는 그 부분을 계속 확인해야 하고요. 폴 발레리가 “명료한 것만큼 신비로운 건 없다”고 했거든요. 스케치를 거쳐 설계가 끝난 후 모든 게 명료해지면 그제야 안심이 됩니다.
사유원의 현암. 통창으로 계절에 따라 변하는 풍경을 액자처럼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건축은 건축주가 존재하기에 건축가의 상상이나 취향으로 결과물을 도출하기 어렵습니다. 설계의 초점을 건축주에게 맞춰야 할까요
단독주택처럼 특정한 개인이 산다면 그의 삶이 설계의 시작이죠. 그래서 건축주에게 선호하는 형태와 색, 재료, 요즘 사는 이야기까지 물어봅니다. 수많은 대화가 끝난 후에 최종적인 결정은 건축가가 하지요. 하지만 오피스나 종교시설, 문화시설처럼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는 곳도 있고, 주인이 이사를 가서 다른 사람이 살게 될 수도 있어요. 결국 건물이 세워질 땅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 땅은 변하지 않고 하늘 아래 똑같은 땅은 없으니 모든 건축물은 땅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갖춰야 해요. 고(故) 김수근 선생님은 “건축가는 건축주가 하는 말을 그대로 행하는 도구나 하수인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지금도 그 말을 늘 새깁니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15년간 김수근 공간 건축사무소에서 일했습니다. 선생님이 기억하는 김수근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김수근 선생님은 한국 현대건축의 1세대이자 한국 건축 모더니즘의 시발점이죠. 이전의 한국건축은 기술의 일부였지만 선생님께서 예술이라는 기반에 올려놓았습니다. 건축의 본질은 공간에 있다면서 건축사무소와 자체 발행 잡지 이름도 〈공간〉이라고 지을 만큼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1986년에 돌아가신 이후 3년간 선생님의 유언에 따라 공간 대표를 맡았으니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인연이었죠. 선생님은 건축이 무엇인지, 건축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알려주셨어요. 그런 시간이 있어서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자신의 건축철학을 찾아 방황과 깨달음의 시간을 가졌어요. ‘빈자의 미학’은 선생님이 평생에 걸쳐 추구하는 건축 원칙이자 정의가 됐습니다. “여기에선 가짐보다 쓰임이 중요하고 더함보다 나눔이 중요하며 채움보다 비움이 중요하다”고요
오랫동안 김수근 선생님 문하에 있었으니 그 뒤로는 나만의 건축을 찾아야 했습니다. 많은 시간을 고민할 때 젊은 건축가들이 모인 4.3그룹에서 〈이 시대 우리의 건축〉이라는 전시회를 열면서 ‘빈자의 미학’을 떠올렸지요. 비움과 절제가 건축의 화두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 금호동 달동네에 가게 됐는데 그곳 풍경을 보며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부산 피난민 동네를 떠올렸어요. 화장실과 우물도 공용이었고, 좁은 골목과 작은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이 함께 놀았지요. 달동네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만든 마을의 구조와 나눠 쓸 수밖에 없는 공간 속에서 더 많은 채움이 느껴졌습니다. 사실 비움은 우리의 옛 건축과 도시의 바탕이었습니다. 도시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안타깝게도 겉모습만 화려하고 채우기에 급급한 건축물로 가득 차게 됐지요.
경기도 광주의 시안가족추모공원. 공원처럼 산책할 수 있는 밝고 편안한 공간으로 구성했다.
빈자의 미학은 선생님께서 1996년에 출간한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축 사유의 기호〉, 〈지문〉,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등 여러 권을 출간했어요. 자신의 철학을 활자로 풀고 책으로 엮는 이유는
세상에 공언하기 위해서죠. 나만의 철학을 정해 놓고 그 말이 싫다고 도망가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젊은 시절의 치기 어린 표현이면 어떻게 할 거냐고 걱정했어요. 다행히도 그 말은 해가 거듭될수록 내게 진리처럼 다가왔어요. 빈자의 미학 속에서 나는 자유로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 마지막 책은 〈빈자의 미학 재론〉이 될 겁니다. 사실 책을 쓰는 이유도 건축 때문이에요. 설계할 때 집약된 단어나 원칙이 정해지면 그 뒤는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 개념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언어를 찾고 글을 쓰는 거예요.
그런 개념이 공간의 이름이 됐겠죠. 1989년에 설립한 건축사무소 ‘이로재’는 ‘이슬을 밟는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로재의 첫 설계는 유홍준 교수의 집인 ‘수졸당’이었습니다. 지금 벽에 걸려 있는 이로재 현판은 그가 원래 갖고 있던 건데, 당시 내가 생각했던 빈자의 미학’과 개념이 흡사했어요. 그래서 설계비 일부로 받았지요. 건축사무소 이름도 그대로 이로재가 됐습니다.
사유원의 명정. 왼쪽 물의 자리는‘망각의 바다’, 오른쪽 붉은 벽은 ‘붉은 명부의 세계’로 불린다.
이로재가 설계한 또 다른 건축물의 이름 또한 심연당, 수백당, 수졸당, 사유원…. 참 아름답습니다
사유원처럼 설계 전부터 이름이 정해지기도 하고, 수백당처럼 설계 중에 단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건물이 지어질 땅을 볼 때 그 언어가 다가오는 경우도 있어요. 모든 땅은 자신이 어떤 건축이 되고 싶어하는지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얘기를 잘 듣는 사람이 좋은 건축가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건축물을 기억하지만 건축가의 시점에서 기억에 남는 건축물은
대부분은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하지만 내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건 수졸당입니다. 나와 이로재의 첫 작업이고 시작점이기 때문이지요.
모든 건축물은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중력에 의해 다 허물어져요. 그러니 건축물에 대한 기억보다 그 건축물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억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건축물에 살거나 일하거나 혹은 지나가면서라도 스치듯 봤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공간에 대한 기억이 오래도록 남았으면 좋겠어요. 그 기억들은 각자 다르지만 모두 소중하고 진실하겠죠.
승효상의 가구 브랜드 ‘이로재 오브젝트’의 ‘수도사 의자 2(Monk Chair2)’.
제주 애월에 여덟 채의 주택이 모인 단지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굉장히 큰 해송나무들이 있어요. 이런 땅은 해송이 단지의 중심이 됩니다. 그 나무들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가장 좋은 설계를 만드는 게 건축가의 역할이에요. 사람에게 지문이 있는 것처럼 땅에는 터무니가 있어요. ‘터의 자취’라는 뜻인데 터무니의 역사와 실제를 없애고 겉모습만 멋들어진 건물은 터무니없는 건축이에요. 모든 사람에게 존재의 이유가 있듯이 그 땅의 건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선생님의 건축철학을 담은 가구를 론칭했어요. 이름이 ‘이로재 오브젝트’입니다.
건축가가 가구를 디자인하는 건 당연합니다. 빈 공간만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의 삶을 그리고 조직하는 게 건축가의 일이기 때문이죠. 건축주의 의뢰로 책상이나 의자를 디자인한 지는 오래됐어요. 간결하고 담백한 선과 면으로 이뤄져 있는, 내 건축의 축소판 같기도 해요. 디자인은 내가 하고, 가구를 만드는 건 오랜 기간 합을 맞춰온 목수 장인들이 합니다.
‘수도사들의 식탁(Monks Refectory Table)’ 디자인을 위한 승효상의 스케치.
‘이로재 가구’가 아니라 이로재 오브젝트라니 다음 오브젝트에 대한 기대가 생깁니다
건축을 하다 보면 건축물 주변의 가로등, 집 안에 놓이는 조명도 만듭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이로재 오브젝트의 다음 프로젝트가 될 수 있겠죠. 문구류나 생활 용품도 그렇습니다.
이로재 오브젝트를 처음으로 선보인 전시명은 〈결구와 수직의 풍경〉이었습니다.
결구는 한국 전통의 목조 건축이나 가구에서 면과 면, 재료와 재료를 서로 연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옛 목조 건물을 보면 못을 박는 부분 없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결구를 통해 짜맞춘 걸 볼 수 있어요. 그게 나무와 가구, 건축의 순리적인 이치이고, 그를 통해 평화로운 결과물이 완성되지요. 이로재 오브젝트의 가구들도 나무로 결구를 만들어 연결했고, 모든 면과 선은 수직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결구와 수직의 풍경이에요.
화이트 큐브 형태의 건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설계한 수백당.
전시의 부제가 〈수도원의 가구〉였어요. 가구마다 수도사 의자, 사제저탁, 수도사 작업대 등의 이름이 붙었고요. 선생님이 수도원을 오래전부터 주목하고 아끼는 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사실입니다. 로마에서 파리까지 수도원 기행을 떠난 이야기를 담은 〈묵상〉을 출간한 적도 있고요
수도원은 아주 절박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에요. 그들은 번뇌와 욕망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 평화를 얻었거든요. 사실 그런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속에서 엄청난 생각과 감정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수도사 의자’를 보면 겉모습은 간결하지만 속으로 서로 맞물린 구조가 앉은 사람의 무게를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 과정이 수도사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수도원이나 묘지 같은 곳을 좋아해요. 여행을 가도 그런 곳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죠.
1986년에 경산시 하양읍의 작은 마을에 들어선 하양 무학로 교회.
라 투레트 수도원. 그리고 르코르뷔지에가 라 투레트 수도원을 지을 때 영감을 얻었다는 프랑스 남부의 르 토로네 수도원도 좋아합니다. 빛과 어두움, 긴장과 고요함, 많은 길과 방들, 그 속에 충만한 침묵까지 한데 담아낸 공간이지요. 여러 번 다녀왔는데 갈 때마다 새롭습니다.
아쿠아리우스 피라미드를 설계하기 위해 승효상이 그린 스케치.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이라는 오랜 임기를 마치고 개인 설계와 전시, 가구 론칭까지 쉴 틈 없었습니다. 그 시점에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위대한 건축가들이 후대에 남긴 명작을 보면 보통 일흔이 넘은 후에 설계한 것이 많아요. 나도 칠순에 접어들었으니 지금부터 만족할 만한 건축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그런 면에서 앞으로 해야 할 설계들이 많이 기대됩니다.
이로재의 첫 설계였던 유홍준 교수의 집, 수졸당.
백색 노출 콘크리트 소재의 면과 선으로 각기 다른 형태를 선보인 서교동의 근린생활시설, 아쿠아리우스 피라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