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성 핑크와 녹은 블랙’(2021)
나 역시 그런 장면을 결국에는 스쳐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잘 잊고, 놓치게 되는 순간을 그림으로 붙잡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 가졌던 생각을 놓치지 않고 시각화하는 일은 후에 그때를 재고하게 한다.
당신이 붙잡아 기록하게 되는 순간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불편함을 야기하는, 뭔가 거슬리는 것들이다. 실질적인 불만을 가진 대상이 있기도 하고, 단지 시각적으로 거슬리는 장면도 있다. 물론 거슬린다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예전에는 외부 사건으로 일어난 파동, 흐려진 경계를 그려왔지만 요즘은 점차 내면에 일어나는 흐름을 보게 된다. 내가 지닌 ‘학습된 시선’에 의문을 품기도 한다.

‘회한의 옆통수’(2021)
내가 즐겨 보던 TV 프로그램의 한 출연자가 누군가에게 비속어처럼 뱉은 호칭에서 파생된 것이다. 하나의 대상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고 싶었다.
‘회한의 옆통수’ ‘뒤집은 채로 감자칩 먹는 여자’ ‘과부하의 밤’ 등 흥미로운 제목의 작품 중 이번 전시의 중심이 된 것
‘회한의 옆통수’에는 후회의 감정을 담았다. 이전에 그렸던 이미지들을 겹치고, 칠한 물감을 닦아내고, 뒤섞으며 장면을 연출했다. 짧은 문장처럼 시작된 이미지들이 여러 감정을 거치면서 완성된 작품이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했던 생각과 가장 겹친다. 작업 활동을 해오는 동안 의도에서 벗어난 상황이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지난 몇 년간 여성의 신체를 많이 그렸다. 당시에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나름 전복적인 태도로 만든 이미지였지만 시간이 지나 이런 작업이 유통되는 과정,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여기저기 떠다니는 모습을 봤다. 죄책감 없이 소비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런 이미지를 만든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나 역시 그냥 그리고 싶어서 그린 것은 아닌지, 복기하며 되묻기도 했다.

‘더블’(2021)
그렇기도 하다. 지금까지 끊임없이 후회하고 망설이고 고민하며 회화 작업을 이어왔다. 괴롭고 힘들어 피하거나 도망가고도 싶었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내가 그림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처음으로 조각 작업을 선보였는데, 철판을 자르고 용접하는 작업 역시 그림 그리듯 하게 되더라.
어떤 호기심이나 갈망이 작업 동력이 되나
나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이 명료한 의견이나 언어라기보다 말로 잘 정리할 수 없고 명확하지 않은 감정으로 일어난다. 이런 걸 뱉어내고 싶은데 그럴 수 있는 방식이 나에겐 회화다. 물론 내일은 또 이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웃음).

‘뒤집은 채로 감자칩 먹는 여자’(2021)
고양이 살구. 이번 전시에 살구가 연출한 장면을 그린 작품도 있다. 살구는 그냥 좀 시무룩한데 놀고 싶은 고양이다. 내게 언제나 많은 영감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