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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와 금속의 만남, 예올과 샤넬이 만든 새로운 공예 미학

지호로 전통을 잇는 장인과 금속으로 새로운 감각을 탐구해 온 젊은 공예인의 손길이 만났다. 2025 예올 x 샤넬 프로젝트가 새롭게 엮은 공예의 시간.

프로필 by 이경진 2025.09.30
지호장 박갑순과 금속공예가 이윤정의 합작품.

지호장 박갑순과 금속공예가 이윤정의 합작품.

매년 가을, 예올 북촌가에서 공개되는 ‘올해의 장인, 올해의 젊은 공예인’은 한국의 장인과 공예가들이 꾸준한 손길로 이뤄낸 미학을 체감할 수 있는 장이다. 샤넬이 재단법인 예올이라는 한국 공예의 든든한 버팀목과 손잡고 전통 장인과 동시대 젊은 공예인의 협업전을 연 것은 올해로 4회째. 매년 장인과 젊은 공예인을 함께 선정, 지원해 과거의 기술과 미래의 가능성을 이어온 이 프로젝트는 지호 공예처럼 소박한 민중 공예부터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화각 공예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공예를 조명하며 지금 여기서 새롭게 이어지는 전통을 만들어간다. 장인을 기려온 샤넬의 오랜 전통, 한국 공예의 미래를 이어가려는 예올의 역할, 서로 다른 재료를 다루지만 같은 태도를 품은 두 장인의 작업이 교차되는 흥미로운 사건이다. 매해 이 프로젝트의 발표를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는 단순히 장인 정신과 기술 보존을 넘어, 전혀 다른 속성으로 분류돼 온 공예라는 장르를 한자리로 엮는 협업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재료와 기법을 연마해 온 장인들이 작업 태도와 물성, 시간성을 매개로 나눈 대화에선 항상 예상치 못한 연결고리가 드러난다. 이 특별한 케미스트리야말로 이 프로젝트의 매력이다.


2025 예올x샤넬 프로젝트 ‘올해의 장인’으로 선정된 지호장 박갑순.

2025 예올x샤넬 프로젝트 ‘올해의 장인’으로 선정된 지호장 박갑순.

박갑순 장인은 까치와 호랑이 등 전통 민화에서 영감받은 지호 공예 기물을 선보였다. 박갑순 장인은 까치와 호랑이 등 전통 민화에서 영감받은 지호 공예 기물을 선보였다.

샤넬과 예올은 이를 통해 1회에서는 금박과 옻칠, 2회에서는 화각과 도자, 3회에서는 대장장이와 유리를 이어 붙였고 올해의 협업 전시에선 전통 지호장과 금속공예가의 손을 잡았다. ‘올해의 장인’으로 지호장 박갑순, ‘올해의 젊은 공예인’으로 금속공예가 이윤정을 선정해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주제 아래 공예가 자연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두 가지 태도를 조명한다. 한지와 풀을 섞어 종이 죽을 빚고, 틀에 겹겹이 덧대 생활 기물을 만드는 지호 공예는 오래된 종이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재생 공예’다. 느리게 쌓고 천천히 말리는 과정 자체가 작품의 얼굴을 결정하는 만큼, 시간의 미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공예이기도 하다. 박갑순 장인은 이 프로젝트의 총괄 디렉터인 디자이너 양태오와 협업해 전통 민화에서 영감받은 동식물 형태의 기물을 선보인다. 까치와 호랑이부터 호박, 버섯, 오리에 이르기까지 단순하면서도 정감 어린 형태에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담아냈다.


 ‘올해의 젊은 공예인’으로 호명된 금속공예가 이윤정.

‘올해의 젊은 공예인’으로 호명된 금속공예가 이윤정.

 이윤정이 불에 녹인 금속을 틀에 부어 형태를 잡는 ‘주조’ 기법을 탐구해 만든 가구와 오브제.  이윤정이 불에 녹인 금속을 틀에 부어 형태를 잡는 ‘주조’ 기법을 탐구해 만든 가구와 오브제.

한편 이윤정은 일상 속 흔한 존재에서 작업 소재를 발견해 온 금속공예가다. 이번 프로젝트에선 불에 녹인 금속을 틀에 부어 형태를 만드는 주조(鑄造) 기법을 깊이 탐구해 주석으로 의자와 테이블 등의 가구를 제작했는데, 단단하면서도 손길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는 금속의 성질을 보여준다. 단단하지만 유연하고, 차갑지만 부드러운 이중성을 담아, 금속이 사용자의 삶에 응답하면서 스스로 변하는 재료임을 드러낸 것이다. 지호와 주조는 전혀 다른 물성을 다루지만 그 밑바탕에는 공예의 공통 철학이 흐른다. 지호는 낡은 종이를 겹겹이 쌓아 새로운 쓰임을 얻고, 주조는 단단한 금속을 불로 녹였다가 다시 굳혀낸다. 두 작업은 재료를 해체하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물성에 시간이 담기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다.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재료 ‘스스로 그러한’ 방식을 존중하는 태도 말이다.


예올 북촌가에서 열린 전시는 ‘경관(敬觀)’ ‘화락(和樂)’ ‘독거(讀居)’ ‘평안(平安)’ 네 장으로 구성된다. 관람자는 공간을 따라 걸으며 종이와 금속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미감을 체험할 수 있다. 양태오의 디렉팅으로 장식을 배제하고 재료가 스스로 말하도록 배치되어, 종이와 금속이라는 상반된 물성이 함께 놓인 조화 속에서 자연스러움의 미학 역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또 다른 매력은 장인들의 새로운 시도를 목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올해 지호 공예는 민화적 모티프와 만나고, 금속공예가 손과 쓰임,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재료로 재해석됐다. 이렇듯 본질을 다시 바라보는 감각이야말로 공예가 오늘의 삶 속으로 파고드는 힘이 아닐까.

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