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사물을 향한 넨도의 발칙한 상상

ㄷ가 말하는 좋은 일상 도구.

프로필 by 윤정훈 2025.09.29

사토 오오키

‘넨도(Nendo)’가 디자인한 물건을 보고 있으면 다양한 감정이 교차한다. ‘이게 뭐지?’ 하고 갸웃했다가,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에 ‘오호라’ 하고 웃음 짓다가, 신박한 기능 이면에 자리한 따듯한 감성에 메마른 마음이 촉촉해지니까. 이토록 유쾌하고 친근한 순간을 선사하는 사물이 얼마나 될까. 넨도는 건축을 공부한 스물다섯의 사토 오오키가 2002년 졸업과 동시에 설립한 디자인 스튜디오다. ‘점토’를 뜻하는 이름처럼 유연한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건축 · 가구 · 조명 · 제품 · 그래픽 등을 넘나들며 남다른 보법을 펼쳤다. 그 결과 형태도 쓰임도 제각기 다른 사물이 탄생했지만 하나같이 쉽고 유쾌하다. ‘이 물건이 기쁨이 될까?’라는 일관된 기준 때문이다. 너무 쉽게 만들어져 금세 버려지거나 반대로 너무 심각해서 외면받는 사물이 넘쳐나는 세상, 그 속에서 사토 오오키는 분명히 ‘좋은 일상 도구’에 대한 정의를 새로 쓰고 있다.


 ‘넨도’ 대표 사토 오오키.

‘넨도’ 대표 사토 오오키.

겹겹이 쌓인 종이 두루마리를 펼쳐 만든 의자, 둥근 셸에 칼날을 숨긴 페이퍼 나이프, 팽이처럼 돌릴 수 있는 뚜껑을 지닌 찻잔. 넨도가 디자인한 사물을 보면 하나같이 ‘피식’ 웃게 됩니다. 일상 도구를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나요

제게 일상 도구란 일상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존재입니다. 생활 속 숨겨진 작은 불편함이나 어긋남을 발견하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양배추처럼 겹겹이 쌓인 주름 종이를 바깥쪽부터 한 겹 한 겹 풀어가며 의자로 사용하는 ‘캐비지 체어(Cabbage Chair)’. 2008년 도쿄 21-21 디자인 사이트 개관 1주년을 기념해 패션 브랜드 이세이 미야케와 협업한 것으로, 플리츠 원단 생산 과정에서 낭비되는 부산물을 써서 친환경적이고 프레임이나 다른 부품이 없이도 튼튼하다.

양배추처럼 겹겹이 쌓인 주름 종이를 바깥쪽부터 한 겹 한 겹 풀어가며 의자로 사용하는 ‘캐비지 체어(Cabbage Chair)’. 2008년 도쿄 21-21 디자인 사이트 개관 1주년을 기념해 패션 브랜드 이세이 미야케와 협업한 것으로, 플리츠 원단 생산 과정에서 낭비되는 부산물을 써서 친환경적이고 프레임이나 다른 부품이 없이도 튼튼하다.

말씀처럼 당신의 아이디어는 언제나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 출발합니다. 그런 기민함은 언제부터 길러졌나요

저는 어린 시절을 캐나다에서 보냈어요. 시골에서 살다 중학생 때 도쿄로 돌아왔습니다. 도쿄라는 큰 도시로 오니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덕분에 평범한 일상에서 비범하고 즐거운 것을 발견하는 일에 익숙해졌죠. 그때 생긴 감각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너도밤나무 가공 브랜드 ‘부나코(Bunaco)’를 위해 디자인한 ‘부나코 스피커’. 투명한 아크릴 실린더 속에 얇은 띠 형태의 너도밤나무로 감싸 불필요한 진동과 왜곡을 줄였다. 나무 띠가 점점 풀려나오는 듯한 장식으로 순수한 나무의 질감과 구조미를 강조했다.

너도밤나무 가공 브랜드 ‘부나코(Bunaco)’를 위해 디자인한 ‘부나코 스피커’. 투명한 아크릴 실린더 속에 얇은 띠 형태의 너도밤나무로 감싸 불필요한 진동과 왜곡을 줄였다. 나무 띠가 점점 풀려나오는 듯한 장식으로 순수한 나무의 질감과 구조미를 강조했다.

 ‘플러스디(+d)’를 위해 디자인한 화산 모양의 티슈 디스펜서 ‘카잔(Kazan)’. 화산처럼 생긴 동그란 본체 위에 구멍을 통과시켜 티슈를 한 장씩 뽑으면 티슈가 화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보인다.

‘플러스디(+d)’를 위해 디자인한 화산 모양의 티슈 디스펜서 ‘카잔(Kazan)’. 화산처럼 생긴 동그란 본체 위에 구멍을 통과시켜 티슈를 한 장씩 뽑으면 티슈가 화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보인다.

그간 수많은 사물을 디자인해 왔죠. 그중 특히 ‘좋은 도구’로 여기는 게 있다면

지금까지 디자인한 모든 제품에는 저마다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어 그중 하나를 최고의 도구로 고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유용하다고 느낀 도구는 펜이에요. 제브라(Zebra)의 볼펜 ‘bLen(블렌)’ 같은 제품이죠. 제가 디자인을 할 때 실제로 즐겨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펜 이야기가 나오니 넨도의 디자인에 언제나 등장하는 귀여운 스케치가 생각납니다. 보는 순간 작은 감탄사를 내뱉게 되는 명쾌한 아이디어가 쉽게 표현돼 있죠. 프로젝트마다 늘 직접 그리나요

네, 늘 직접 그리고 있어요. 프로젝트의 최종 결과물이 아무리 복잡하고 규모가 크더라도 처음 떠오른 아이디어만큼은 항상 단순하게 유지하고 싶거든요. 프로젝트는 늘 변화하고 때로는 팀원들이 방향을 잃기도 하니까요. 그럴 때 이 단순한 아이디어를 시각화한 스케치가 등대 혹은 이정표처럼 작용해 다시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을 줍니다.


숫자 대신 민들레 씨앗으로 시간을 표시한 렘노스의 ‘댄드라이언(Dandelion)’.

숫자 대신 민들레 씨앗으로 시간을 표시한 렘노스의 ‘댄드라이언(Dandelion)’.

넨도의 사물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툭’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목표한 기능이나 미감을 넘어 굳이 작은 놀라움을 더하는 데 어떤 의도가 있을까요

기능만으로는 사람과 사물 사이에 풍부한 관계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디자인에는 친근함이나 기쁨 같은 감정적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번뜩이는 느낌표나 웃음 같은 것 말이죠.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에서 그런 것들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고 믿습니다.


빛을 자유롭게 걸어놓을 수 있는 루이스폴센의 포터블 램프 ‘토모시(Tomoshi)’.

빛을 자유롭게 걸어놓을 수 있는 루이스폴센의 포터블 램프 ‘토모시(Tomoshi)’.

미니멀한 형태와 직관적 기능, 여기에 감성까지 구현합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일일 텐데요

미니멀하고 단순한 디자인은 자칫 차갑고 무정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 ‘함정’을 피하면서 그 안에 어떻게 감정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과제죠. 단순히 기능적 만족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이야기와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요. 단순함 속에 ‘유희’나 ‘놀라움’ 같은 요소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녹여낼지 늘 고민합니다.


세 가지 마우스 필 구조로 서로 다른 맛과 향을 선사하는 맥주잔.

세 가지 마우스 필 구조로 서로 다른 맛과 향을 선사하는 맥주잔.

대담한 색감이나 복잡한 형태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습니다. 첫눈에 강한 인상을 주기엔 불리하지 않을까요

색이나 형태를 너무 강하게 내세우면 그 사물이 지닌 아이디어나 이야기가 잘 전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절제된 디자인이 다양한 공간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언제 어디서든 제품이 오래도록 사용되기 위한 ‘여백’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풍차처럼 돌아가는 포인터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카자도케이 미니(Kazadokei Mini)’.

풍차처럼 돌아가는 포인터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카자도케이 미니(Kazadokei Mini)’.

넨도의 제품은 마냥 단순해 보여도 의도한 형태와 기능이 디테일해 제작 중 적잖은 어려움이 따를 것 같습니다. 기능, 가격, 브랜드 요구 조건이 충돌할 때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나요

맞습니다. 단순해 보이는 디자인일수록 더 치밀한 시행착오와 수많은 어려움이 뒤따라요. 그럴 때마다 ‘이 디자인이 사용자에게 기쁨이나 놀라움, 친근감을 줄 수 있는가’를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두꺼운 나무 뚜껑을 팽이처럼 돌릴 수 있는 ‘톱-티 세트(Top-tea Set)’.

두꺼운 나무 뚜껑을 팽이처럼 돌릴 수 있는 ‘톱-티 세트(Top-tea Set)’.

기술은 점점 더 똑똑해지고, 소비 속도는 빨라지며, 이제는 환경까지 생각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앞으로 일상에 놓일 도구는 어때야 할까요

디지털화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물건을 직접 만지고 사용하는 ‘물리적 체험’이 더 중요해진다고 느낍니다. 이젠 단순히 어떤 기능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요. 손에 닿았을 때의 기분 좋은 감촉이나 왜 이 물건이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존재해야 하는지 등등의 요소도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사물은 그러한 감각이나 이야기까지 담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글을 쓸 때 미세한 움직임에 본체와 잉크 심 사이를 고정하는 제브라의 ‘블렌(BLen)’.

글을 쓸 때 미세한 움직임에 본체와 잉크 심 사이를 고정하는 제브라의 ‘블렌(BLen)’.

디자인에 대해 당신이 오래 지녀온 믿음을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공유한다면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불안을 받아들이는 자세요. 디자인이라는 일에는 늘 불안이 따라옵니다. 그걸 없앨 순 없어요. 그보다 불안 자체를 어떻게 다루고 활용할지 터득하는 게 중요하죠. 또 디자인에 푹 빠져들어 프로젝트의 크기나 위치, 공공성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디자인적 관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하고 즐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선형 셸에 칼날을 숨긴 ‘노틸러스 페이퍼-나이프(Nautilus Paper-Knife)’.

나선형 셸에 칼날을 숨긴 ‘노틸러스 페이퍼-나이프(Nautilus Paper-Knife)’.

두 원통이 서로 맞닿아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플로스의 ‘사와루(Sawaru)’.

두 원통이 서로 맞닿아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플로스의 ‘사와루(Sawaru)’.

넨도는 한 해에만 수백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한다죠. 요즘 당신이 가장 집중하고 있는 건 무엇인가요

‘2025 오사카 · 간사이 엑스포 일본관’입니다. 전시물부터 가구, 굿즈에 이르기까지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디자인하고 있어요. 대형 건축 프로젝트지만 제겐 하나의 ‘거대한 제품’을 디자인하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