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엘르 보이스] 비행기를 타고 가버린 너에게

우리 시차는 어떻게 되는 거야?

프로필 by 전혜진 2025.09.08

최근에 오래 살던 동네와 이별을 했다. 오랜 시간 한 빌라에서 함께 살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자신의 공간을 찾아 떠났고, 나도 이내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했다. 이별이라니까 거창하지만, 별것 아니었다. 분리된 것뿐이다. 지금 이 순간 혹은 공간과의 분리. 물론 분리되는 경험은 쉽지 않다. 엄마에게 기생하며 생명 줄을 유지하다가 혼자서 첫 숨을 쉴 때도, 난생처음 유치원에 가야 했을 때도, 대충 적응해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을 때도 항상 어딘가로 떠나야 했고, 나는 그럴 때마다 많이 울었다.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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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다가 그 모든 기억을 과거에 둔 채 홀로 떠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이별 혹은 분리란 언제나 슬픔을 동반한다. 내가 자주 슬픔을 느끼는 지점은 이런 부분들이었다. 분명히 있었는데 사라진 무언가, 누군가 존재했다는 증거. 언젠가 걸었던 거리를 우연히 다시 찾았을 때 나를 통과하는 잔상들. 그러니까 과거에 남겨진 모든 것. 그러므로 이 동네를 과거에 묻는다니 조금 슬픈 기분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냥 홀로 선 것뿐이다. 어떤 이별도 그런 개념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별것 아니게 되는 기분이다. 요즘 이렇게 산다. 그냥 가볍게 말이다. 너무 힘주고 살다 보니까 자주 휘청거리는 것 같아 몸을 가볍게, 안 꺾이게, 바람이랑 굳이 박치기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지나쳐 갈 길 가도록, 뒤돌아볼 미련도 안 갖게.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아무튼 이렇게 오롯이 나만의 공간을 갖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내가 집에서 뭐 하고 살았더라 싶었는데 알고 봐도 별것 없었다. 일하고, 밥을 먹고, 노래를 듣다가 영어 공부를 조금 하고 책 보고 고양이를 돌보고 그런 것. 일상이 반복되면 삶이 되는데, 응당 어렵고 복잡한 게 삶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에 일상이 무심하게 반복되면 내가 제대로 살고 있지 않은 기분이 든다. 아, 근데! 그런 초조함을 안고서 어떻게 몇십 년을 더 살 것인지? 이벤트라는 건 예상할 수 없도록 매 순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벤트라 불리는데, 어떤 이벤트는 차라리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이런 일상도 괜찮은 것 같다. 이벤트가 마구 열리던 시기는 진작에 지나갔고, 이제 나는 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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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공기청정기가 한 대 있었다. 공중에서 고요하게 부양하는 고양이 털을 빨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성질은 부려줘야 한다는 듯이 굉음을 내던 물건이었다. 그 공기청정기는 고양이 털과 함께 공간의 모든 혼을 함께 빨아들였는데, 그래서인지 할 일을 마친 기계가 잠시 쉴 때면 세상이 멈춘 듯 고요했다. 하지만 세상이 멈춰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시간이 내는 소리가 고요라면, 세상이 멈춰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네’가 비행기를 탄 날, 문득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떨 땐 너무 빠르고 어떨 땐 너무 느리다는 점에서 시간이 종종 이상하게 흐른다는 걸 느꼈는데, 그것의 실체를 본 날이었다. 누군가와 닿아 있을 땐 너무 빠르고, 빨래방에서 빨래가 끝나기를 기다릴 땐 너무 느린 시간이 야속했다. 고로 시간은 언제나 야속했다. 너를 비행기에 태워 보내고 난 뒤, 나는 이곳에서 오랜만에 정속의 시간을 느끼고 있다. 아닌가. 야속하게도 게을러 빠진 시간인가? 잘 모르겠다. 한 번도 일관적이지 않은 시간을 앞에 두고 네가 있을 때와 홀로 보내는 시간의 속도를 셈하다가 무엇을 기준점으로 세워야 하는지 헷갈린다. 너는 이곳에서 나와 같은 시간을 보내다가 중력을 거슬러 한 시간 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네가 과거로 갔어도 너의 세상은 현재로 흐르고 있다는 걸 인식하면서 우리가 분리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현재에 있는 나와 과거에 있는 너, 현재에 사는 너와 미래의 나, 계속 분리된 채 있는 우리. 네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나면, 다시 말해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흐르는 시간에 네가 저항하지 않을 때 너의 현재는 곧 미래가 될 것이고, 그제야 너의 미래는 나의 현재에 안착할 것이다. 그 사실은 나를 안도하게 하지만 일종의 무력함까지 안겨줬다. 이 뒤죽박죽인 시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니.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안락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난다. 안락으로 향하는 길은 하나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아주 느린 속도로 흐르는 시간을 감각하는 것. 그러니까 네가 없는 시간을 딛고 홀로 서 있어보는 것. 분리라는 게 언젠가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혹은 연결돼 있기에 느끼는 고독이라면, 고독은 우리가 이미 섞여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혼재돼 있(었다)는 감각이 착각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시간은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순서대로 흐르지 않는다던 어느 과학자의 말을 내 멋대로 실감한다. 과거는 허상이 아니므로 너는 존재하고, 그러니 나는 언제든 그곳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공기청정기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손수현

대한민국 배우, 작가. 드라마 <블러드> <막돼먹은 영애씨>와 영화 <마더 인 로> <럭키, 아파트> 등에 출연했다. 단편 <프리랜서>와 <선풍기를 고치는 방법>을 연출했으며, 저서로 <밥을 먹다가 생각이 났어> <쓸데없는 짓이 어디 있나요>와 <새드 투게더>가 있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글 손수현
  • 사진 ©unsplash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