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내린 눈이 녹고 있었다. 눈 녹는 소리는 곧 빗소리처럼 쏟아지며 건물을 울렸다. 건축가 유이화가 말했다.
천창이 있어요. 때문에 완벽한 방음은 어렵겠지만 감수하며 설계했습니다. 눈이나 비가 올 때 더 좋겠다는 마음으로 두었죠.
제주 한립읍 저지예술인마을에 문을 연 유동룡미술관.
지난겨울 3년간의 준비를 마치고 제주도 한림읍 저지예술인마을에 개관한 유동룡미술관은 2011년 이타미 준이 타계하며 남긴 서랍 속 유언에서 시작됐다.
내 이름을 딴 문화재단, 기념관, 건축상을 만들어라. 모든 책임은 딸 유이화에게 있다.
이타미 준의 1975년 작인 ‘먹의 집’을 연상케 하는 내부. 원형 공간은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라이브러리다.
유동룡의 딸이자 건축가인 유이화는 현재 이타미준건축문화재단 이사장이자 유동룡미술관 관장이며, 건축주인 동시에 설계자다. 이타미 준 생전에 아버지와 딸은 함께 현장을 누볐다. 수풍석 박물관과 방주교회 등 제주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이타미 준의 건축 작품들이 안착하기까지 끝없는 아이디어와 촘촘한 과정을 공유하며 호흡을 맞춰온 사이. 유이화는 유동룡미술관을 설계하는 동안 아버지의 마음이 되고자 했다.
연면적 약 675㎡의 크지 않은 미술관이지만 계단과 복도 등의 동선에 따라 천천히 걸으면 느껴지는 묘미가 있다. 미술관 경험은 2층에 있는 세 개의 전시실에서 시작된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조응하는 방식 그리고 지역 풍토와 역사를 고민했다. 유동룡미술관은 이타미 준의 첫 작품인 ‘어머니의 집’(1971)과 첫 작업실 ‘먹의 집’(1975) 그리고 제주의 자연 속에 안긴 ‘포도호텔’(2001)까지 세 작품을 오마주했다. 묵직한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먹의 집’ 내관이 연상되는 검은색 공간이 펼쳐지는 가운데, 왼편으로 외부 환경을 향해 볼록하게 돌출된 창가 자리가 눈에 띈다.
이타미 준이 쓴 책 그리고 그가 영감받은 작가들의 책을 볼 수 있는 라이브러리다. 천장부에는 제주도의 생김새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지러진 원형, 타원형의 매스가 육중하게 자리한다.
주변 지역이 지닌, 수평적 환경에 순응하고 어울리는 건물을 짓고 싶었어요. 오름이라든가 포도호텔에서 구현한 제주의 전통 초가처럼 가장 제주스러운 형태가 어떤 것일까 고민했죠. 시작은 제주도 모양을 본뜬 타원형을 그리는 일이었어요. 라이브러리 천장부 구조가 설계의 시작이었습니다. 더불어 아버지의 사상이 바탕인 뮤지엄이니 이 지역의 맥락을 기반으로 했어요.
유동룡미술관만의 특별한 차를 맛볼 수 있는 티 라운지.
유이화에게는 뮤지엄의 비전을 정립하는 일이 큰 숙제 중 하나였다. 지금은 개관전으로 이타미 준의 40여 년 건축 작업을 회고하는 전시를 열고 있지만, 앞으로 유동룡미술관의 철학을 바탕으로 기획된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미술관은 누군가의 경험을 연장시키는 장소여야 해요. 관람자의 총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을 어떻게 디자인하면 좋을지 고민했습니다. 들어섰을 때 온통 검은 이 장소의 어딘가에서 기분 좋은 향기가 풍겨온다면, 먹의 향이 번져 온다면, 오래된 서적에서 나는 향을 느낄 수 있다면 어떨까 하면서 조향사와 프래이그런스 개발도 했습니다. 티 라운지에서는 ‘바람의 건축가’인 유동룡을 담기 위해 민트 블렌드 녹차를 대표 메뉴로 냅니다.
아래는 이타미 준의 첫 작품인 ‘어머니의 집’.
아미타 준은 1990년대 후반부터 건축이 어떤 매개가 될 수 있는지 깊이 고민하며 손으로 쓴 글과 드로잉으로 건축작업을 이어간 이타미 준의 완숙기, 그의 주무대는 제주였다. 이타미 준은 온기와 야생미를 지닌 제주의 풍토와 기꺼이 동화되길 바랐다. 2층에 오르면 이타미 준이 남긴 건축물의 모형과 사진이 전시돼 있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바람의 조형〉전에서 재현했던 이타미 준의 작업실도 구현돼 있다. 작업실 한 편의 붉은 화폭은 바로 그의 그림.
1층에서 2층 천장까지 이어지는 타원형 공간.
이타미 준은 건축가로 사는 동안 종종 그림을 그렸다. 건축가이자, 화가였으며 시인이었던 그는 2011년에 출판된 책 〈ITAMI JUN 1970-2011 이타미 준의 궤적〉에 이렇게 썼다.
새로운 세계로 향해 도전하기보다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서서 움직이고 싶지 않은 충동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제주도를 본뜬 타원형을 그리는 일이 미술관 설계의 시작이었다.
자신 역시 자연물이 된 듯 서서 땅과 바람, 돌의 말에 귀 기울이길 원했던 건축가, 화폭 앞에 우뚝 서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모습은 일생동안 품었던 도공의 마음처럼 깊은 ‘무심(無心)’과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