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식 메밀 편수. 네모진 만두피 속에 채소와 고기 소를 넣고 네 귀를 모아 빗는다. 찌거나 차갑게 식힌 장국에 띄워 초장에 찍어 먹는다.
양손 가득 무게감이 느껴지는 책을 조심스럽게 펼쳐놓고 표지를 넘 기면 18세기에 그려진 해동지도 중 한 장면이 나온다. 개성의 옛 이 름, 송도. 한국전쟁 전까지 경기도 일부였던 개성의 풍경을 송악산 을 중심으로 담은 것이다. 이어지는 다음 장들은 푸르다. 구본창 작 가가 촬영한 고려시대 청동 정병들과 청자 대접, 당초무늬 사발과 술잔이다. 오래 전 사라진 옛 왕조를 향한 향수에 젖어들 때쯤 21세 기에 구현된 음식 사진과 미려한 묘사들이 넘실대며 요동친다.
1, 3 밀가루에 참기름, 꿀, 술을 섞어 반죽한 것을 기름에 튀겨 집청한 유밀과. 궁중 음식이나 의례 음식으로 많이 쓰여 개성과 한양 지역에서 발전했다. 개성약과는 켜켜이 살아 있는 식감과 진한 생강 향이 특징이다. 만두과는 개성약과 반죽에 대추 소를 넣고 작은 만두 모양으로 튀긴 것이다. 2 궁중 음식과 반가 음식을 오랜 시간 전수받은 조은희 방장과 신라호텔 ‘서라벌’ 주방을 지켰던 박성배 수석연구원. 두 사람 모두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온지음 맛공방에서 근무하고 있다.
‘조랭이 떡국은 맑은 쇠고기 육수에 지단을 올려 끓인 개성의 대표 적인 설 음식이다. 동글납작한 떡국 떡이 아니라 조롱박을 닮은 귀 여운 떡을 넣는 것이 특징. 예부터 개성 사람들은 섣달그믐이면 온 식구가 모여 앉아 가늘게 뽑은 흰 가래떡을 대나무 칼로 밀어 가운 데가 잘록한 조랭이 떡을 만들었다.’ 문장을 읽으며 사이좋게 머리 를 맞대고 대나무 칼로 떡을 빚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황해 도 사람들은 녹두농마국수를 먹어야 한 해를 건강히 난다 여겼는 데, 녹두에는 몸의 열을 내려주는 효능이 있어 특히 여름철에 즐겼 다”는 말에는 이른 오전 밭일을 마치고 국수를 호로록 들이켜던 사 람들을 떠올리고, “설렁탕은 여러 유래가 전해지지만, 고려 말에 고 기를 맹물에 삶아 먹는 ‘술루’라는 몽골식 조리법이 전래된 것에서 그 시초를 찾기도 한다”에 와서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광활한 이북 의 광야를 상상한다. “고려의 밤은 복숭아만큼 크다는 얘기가 전해 질 정도로 튼실한 데다 달고 맛있기로 유명했다. 밤을 얇게 편으로 썰어 밤전을 부쳐보자. 색다른 별미가 입맛을 돋울 것이다”라는 율 전에 달라붙은 문장에는 나도 모르게 ‘꼴깍’ 군침을 삼켰다. 전통문 화연구소 온지음 맛공방이 펴낸 새 책 〈온지음이 차리는 맛:뿌리와 날개〉 이야기다.
1 봄에 나온 여린 애호박에 소고기를 더해 쪄낸 개성 애호박선. 게살을 더해 온지음식으로 해석했다.
2 5~6월에 수확하는 밀은 그해의 첫 곡물로 신에게 올렸다. 밀전병에 도라지와 닭고기를 찢어 만든 위천신은 손님들의 반응이 가장 좋았던 메뉴 중 하나. 간송미술관 전통매듭장 김은영 관장으로부터 레서피를 전수받았다.
온지음 맛공방이 개성과 고려 음식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언제 부터일까.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경복궁 서편 돌담을 마주한 온지 음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온지음 레스토랑의 얼굴, 조은희 방장과 박성배 수석연구원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야기는 약 2019년으로 거 슬러 올라간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어요. 조선 반가 음식을 토대 로 한 음식을 꾸준히 선보여왔으니 이제 새로운 접근을 해보자. 그 렇다면 개성 음식, 이왕이면 고려로 폭을 넓히면 어떨까 하는 마음 이었죠.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아 이북 음식을 먹어온 어른들의 기록 과 경험이 중요했어요.” 조은희 방장의 말이다. “반가 음식을 만들며 고조리서로 공부하다 보면 이전의 조리서들이 자연스럽게 궁금해 져요. 문화가 꽃피었던 개성 음식이 나중에 한양 음식에까지 영향 을 미쳤으니까요.” 그의 짝꿍 박성배 수석연구원이 덧붙인다.
3 온지음 맛공방의 세 번째 요리책 〈온지음이 차리는 맛-뿌리와 날개〉. 레서피와 사진뿐 아니라 고지도, 구본창의 청자 사진, 전문가와 문인들의 개성 음식에 대한 글까지 꾹꾹 눌러 담았다.
‘꽃피었던 고려의 문화’! 잊고 지냈던 역사에 대한 감각에 불이 켜진 기분이었다. 지금의 ‘코리아(Korea)’라는 이름 또한 고려에서 비롯 했으니까. 온지음의 홍정현 기획위원이 서문에서 묘사한 고려를 보 면 온지음이 고려 음식에 주목한 이유는 한층 선명해진다. “왕조 고 려는 한반도를 최초로 통일한, 자주적이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나 라였습니다. 유불선 3교가 공존했던 유일한 왕조였으며, 송 · 원 · 금 나라와 일본, 아라비아까지 활발한 외국 교류로 경제력을 가진 호족 출신 귀족들이 문화를 선도적으로 이끌어나가던 시대였습니다. 이 런 영향 아래 고려의 밥상은 더없이 다채롭고 풍요로웠습니다.”
4 보김치를 온지음 방식으로 해석한 어육김치냉채. 박완서 작가가 책 〈미망〉에서 묘사했듯이 커다란 장미 꽃송이가 겹겹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 같은 보쌈김치는 화려한 고려 문화를 반영한 요리 중 하나다.
5 햇된장에 간 고기를 넣고 양념 반죽해서 둥글납작하게 빚어 말려두었다가 구워 먹는 장떡의 일종인 개성장땡이.
익으니까 너무 맛있더라고요. 김치가 반찬의 역할을 뛰어넘어 일품 요리가 됐다는 점에서 김치의 변신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처음 에는 각자 놀던 재료들이 잘 익혔을 때 발효되며 조화를 이루고, 결 국 맛있는 김치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아직도 신기한 듯 말하는 조 은희 방장에게서 한식을 향한 끝없는 탐구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 었다. 그런 그도 인정하는 것이 음식에 대한 개성 사람들의 자부심 이다. “자기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정말 자신 있어야 할 수 있는 거 잖아요? 그런데 개성만두, 개성편수, 개성주악 모두 ‘개성’이 붙어요. 이 음식들이 시대를 거슬러 지금까지 후손들이 먹고 있다는 게 굉 장히 사치스럽기도 하죠. 맛있었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은 거예요. 지금 한과가 다시 사랑받는 것처럼 옛것들을 자꾸 끄집어내 이게 진짜 우리 음식이라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역사는 쭉 이어지는 것이니까요.” ‘음식’을 통해 고려를 돌아본 두 사람이 이 시대에서 발견한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면 무엇일까. 맛공방에 근무한 10년 동안 박성배 수 석연구원은 ‘도자사(史)’에 빠졌다. “청자가 정말 아름다웠어요. 힘 을 뺀 아름다움이랄까. 그게 고려의 힘 아닐까요.” 조은희 방장은 온 지음 옷공방을 통해 만난 고려의 의복을 꼽는다. “고려시대 여인들 은 바지를 입었더군요. 옷감도 굉장히 화려해요. 그 바지를 보며 교 역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많은 문물이 오가던 시대에서 보다 개방 적이고 진취적이었을 고려 여인들을 상상했습니다. 말을 탈 수도 있 었을 테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지금 서울에서 이어진다. 기억과 혀 를 타고. 알알이, 표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