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박현기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미술과 건축을 공부하던 시절을 제외하곤 대구에서 자라고 활동했다. 그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거치며 우주의 근원과 그 존재 등 심오한 주제를 가장 최신의 미디어를 통해 표현한 아방가르드의 최전선이었다. 또한,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졌으나 조각, 설치, 퍼포먼스, 회화,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비디오 아트에만 국한하기에는 다소 아쉽다. 박현기 작가는 인테리어 사업으로 번 돈으로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미술을 펼치다 2000년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아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2만여 점에 달하는 작업에 대한 사후 평가가 활발히 이뤄지며 여러 전시가 열렸다. 갤러리현대가 기획한 박현기의 세 번째 개인전 〈I’m Not a Stone〉은 1978년부터 1997년까지의 커리어를 폭넓게 아우르며 창작 활동의 전환점이 되는 기념비적인 대표작을 엄선하여 소개한다.
〈Untitled, 1983(2015년 재제작), 돌과 마이크, 스피커, 소리, 가변크기
전시장의 검은 바닥 곳곳에 어딘가에서 쓸려 온 것 같은 크기가 다른 돌들이 퍼져 있는 〈Untitled〉은 1983년 대구 수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발표한 작품을 재제작한 것이다. 이때 작가는 관람객 없이 등에는 “I’m Not a Stone”, 가슴과 배에는 “stone and so forth”라고 쓴 채 돌무더기 사이를 돌아다니며 퍼포먼스를 펼쳤다.
전시 관람의 시작점은 지하 1층, 실재 돌과 인공 돌을 교차해 쌓은 세 점의 ‘돌탑’이 좋겠다. 1978년 열린 개인전에 돌탑 작품을 처음 발표한 이후 작가는 평생 돌을 작업의 주재료로 활용했다. 작가에게 돌은 “태고의 시간과 공간을 포용하는 자연”이며, 선조들의 미의식을 간직한 정신적 산물, 세상을 비추는 카메라, 이미지가 상영되는 스크린이었다. 작가 노트에는 한국 전쟁 당시 피난길에서 마주한 고갯마루의 서낭당 돌무더기 전경을 잊지 못한다고 적어 놓았다.
이 돌탑은 2층 전시장의 3m가 넘는 ‘TV 돌탑’으로 이어진다. 합성수지로 만든 호박 빛의 인공 돌은 돌을 화면에 띄운 TV 모니터로 대체됐다. 실제 대상과 모니터 화면의 환영 이미지가 공존하는 생경함을 강조하는 조각적 비디오 작업 가운데 특히 이 작품은 왕릉을 지키는 거대한 비를 연상케 하며 전시장을 종교적이고 명상적인 공간으로 만든다.
〈Untitled〉, 1978(2015년 재제작), 돌과 레진, 가변크기 돌무덤, 선돌, 절터 등 정신적 장소를 즐겨 찾고 골동품 수집에 공을 들였던 작가에게 돌을 쌓으며 소원을 비는 유구한 행위는 자연물을 다루는 개념적 태도와 미적 형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Untitled〉, 1988(2021년 재제작),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무음; 모니터, 돌, 가변크기 작품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작품의 육중한 스케일과 존재감을 느껴보길 권한다.
2층 전시장 다른 쪽에는 1990년대 중반 선보인 또 다른 대표작 〈만다라〉 연작 네 점이 자리한다. 어두운 전시장, 무릎 높이의 불교 의례용 헌화대 윗면에 천장의 프로젝터에서 영상이 투사돼 붉게 빛난다. 백여 겹이 넘는 레이어로 직조돼 속도감 있게 재생되는 영상은 워낙 빠르기에 처음엔 스피디한 리듬과 잔상만 남지만 조금 지켜보다 보면 포르노 영상과 불교 도상이 겹쳐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쌓기’라는 건축적 조형 언어와 성과 속의 교차를 꾀한 이 작품은 동시에 당시 막 도입된 디지털 영상 편집 기술을 의욕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박현기 작가의 ‘얼리어답터’ 기질도 엿볼 수 있다.
만다라 시리즈, 1997-1988,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캔톡, 가변크기
〈Untitled (ART)〉, 1986(2021년 재제작), 나무판, 철판, 가변크기
건축과 인테리어 디자인을 생업으로 삼아 작가 생활과 병행한 박현기 작가에게 ‘공간 연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작가는 1980년대 일련의 공간 설치 작품들을 통해 전시장 환경 자체와 관람객의 경험에 초점을 맞췄다.
4월 21일~5월 30일 갤러리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