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고니의 시간을 엿보기
윤끼는 인간의 시간과 다른 동물의 시간을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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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닭둘기!” 비행 기능을 잃어버린 듯한 도시의 야생동물, 비둘기. 도시인에게 ‘야생동물’은 낯선 단어지만, 길가의 회색 웅덩이에서 목을 축이고 있는 비둘기 역시 야생동물이다. 비둘기, 참새, 까마귀, 까치 등 도시에 얼마나 다양한 야생 새가 있을지 한 번쯤 생각해 보면 흥미롭다. 서울에는 생각보다 여러 종류의 새들이 있고, 새벽 해가 어슴푸레 떠오르는 시간에 산자락을 올라가 보면 낮에는 들을 수 없는 황홀한 소리들이 도시의 경계를 채운다. 도시에서 아주 조금일지라도 인간의 흔적이 희미해지는 곳으로 향할수록 야생동물의 흔적은 짙어진다.
시작은 고요함을 찾아 떠나면서부터였다. 닭장 같은 집합 건물은 리모델링 공사 소리와 오가는 차의 소음으로 가득했다. 도시의 삶을 선택한 이상 이것 역시 함께 누려야 할 즐거움이라지만, 겨울의 그날은 오래된 타일을 철거하는 건지 의자부터 흔들리는 진동 때문에 더는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고요한 장소를 찾기 위해 스마트폰과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무작정 차에 올랐다. 도시에서 멀어져 좀 더 자연에 가깝게 가고 싶었다.
강줄기를 따라 한 시간 정도 달리면 한적한 생태 습지가 나온다. 양옆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에는 나무가 사람보다 빽빽이 심어져 있다. 주중에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안팎의 혼란을 잠재우고 싶을 때 종종 향하는 곳이다. 도시가 모든 감각을 깨우고 뒤흔들고 있다면, 이곳에서는 느슨한 감각을 유지하면서 비어 있는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겨울의 한복판에선 초록색을 모두 잃고 앙상한 가지와 바스러질 듯한 갈대만 존재했다. 황량한 강가를 찾는 인적도 거의 없어 신록이 풍성한 봄이나 여름보다 겨울의 습지를 찾는 게 좋았다.
겨울의 습지는 우아하다. 살짝 얼어붙은 수면에 햇빛이 부드럽게 반사되고, 바싹 말라붙은 수초들이 에칭처럼 수면을 긋고 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더욱 우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가느다란 수초 사이를 유유히 혹은 힘차게 헤엄치는 흰고니, 잿빛 고니들이다. 처음 그들을 알게 된 건 탐조 목적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공기를 밀어내듯 구애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운 좋게 그들의 구애에 응할 수 있었다. 비록 나를 향한 구애는 아니었지만. 소리를 쫓아가 보니 녀석들은 낯선 날개 없는 동물의 등장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들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살얼음이 만들어낸 오묘한 빛과 차가운 겨울 공기, 새하얀 고니를 처음 봤을 때 그 시공간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었다.
“자연의 것들은 모두 곡선이다”라는 말을 증명하듯 노란 부리에서 시작해 머리의 가장 높은 지점을 지나 길고 둥글게 뻗은 목선 그리고 등으로 이어져 다시 살짝 위로 솟은 꼬리깃까지, 그들의 형체가 기품을 뿜어내고 있었다. 개체에 따라 깃털의 빛깔이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했지만, 특히 성체들의 털빛은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우아하고 숭고했다. 새하얀 어미 고니들은 잿빛의 자식들을 돌보고, 아직 짝을 찾지 못한 고니들은 끊임없이 구애하고, 그 옆에서 일부는 물속에 자맥질을 하며 먹이를 찾는다. 그 순간 나는 관찰자이자 운 좋게 그들의 행위를 엿보았다.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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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백조의 호수’를 쓴 차이콥스키의 고향 러시아 북방으로부터 따뜻하고 먹이가 풍부한 겨울을 찾아 약 4000km를 날아 한국으로 온다. 그리고 어떤 ‘때’가 되면 아무 항해장치도 없이 몸에 새겨진 본능에 이끌려 머나먼 이동을 시작한다. 녀석들이 나는 모습을 보면 자연의 시간을 알 수 있다. 알림과 마감, 업데이트처럼 시간을 분절시키는 장치가 없는 그들은 온몸으로 계절과 시기를 느끼며 ‘때’를 탐지한다. 그들의 움직임은 현재 환경에서 ‘몸’이 말하는 시간과 속도를 능동적으로 따른다. 자신이 곧 시간이 되는 것이다. 외부적 시간에 자신을 맞춰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이 느끼는 때가 오면 비로소 움직임으로써 스스로 시간이 되고 자신의 리듬을 찾아간다. 그리고 한번 시작한 리듬과 속도를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이 ‘때’를 결정하고 동료들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먼저 그곳에 도착하는 게 아니라, ‘낙오자 없이’ 최대한 많은 개체가 무사히 이동을 마치는 것이다.
그들의 날갯짓은 인간 시간의 절대성을 조용히 흔든다. 본능적인 동물의 시간 앞에서 도시 소음으로 무뎌진 감각이 되살아난다. 그 순간, 내가 살아가는 시간의 모양을 다시 생각한다. 선형으로 흐르는 내 시간은 그들에게서는 원형으로 흐르고 있다. 현대인에게 시간은 앞으로 끊임없이 밀려가는 직선이지만, 고니에게 시간은 계절을 따라 돌아오는 원이다. 스스로의 시간과 속도 그 자체로 살아가는 것이 왜 이토록 어려운 일이고, 본능적인 리듬을 지킨다는 것이 왜 사치처럼 느껴지는가.
고니의 동물적 시간을 한참 염탐하다가 다시 도시로 향한다. 도시에 들어서서 6차선 도로에 갇히면 알게 된다. 고니처럼 살 수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겨울마다 ‘때’에 스스로 도달하는 존재를 목격하기 위해 그들처럼 습지를 찾을 것이다. 그들을 목도하고 그 장면에 잠시라도 존재했던 이상 시간을 바라보는 방식이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 느리게 시간을 유영하는 그들을 지켜보며 내 시간은 누구보다 빠르게 흘러갔으니까.
가끔 도시의 일상에서도 시간 흐름이 달라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만큼은 ‘규격화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주체가 된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글을 쓰고, 하얗게 세어버린 강아지의 흰털을 쓰다듬고, 새의 날갯짓을 하염없이 감탄한다. 기계적 시간에 저항하며 사랑하는 것들과 시간의 향기를 나눈다. 그런 순간이 모여 자신의 고유한 리듬이 생기고, ’나’라는 세계이자 그 세계 속 한 개체의 카이로스적 시간이 존재하길 바란다.
윤끼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특별상을 수상한 <유기견, 유기묘, 유기인의 동거일지> 저자. 그는 스스로 ‘유기인’이라 칭한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글 윤끼
- 디지털 디자이너 민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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