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여전히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아르데코의 흔적

과거의 미학이 어떻게 오늘날의 럭셔리로 변주됐다.

프로필 by 이경진 2025.07.30

EASTERN COLUMBIA BUILDING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의 브로드웨이 극장 지구 한복판, 청록색 테라코타 타일과 황금빛 장식으로 눈부신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스턴 컬럼비아 빌딩 역시 아르데코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1930년, 건축가 클로드 빌먼(Claud Beelman)의 설계로 9개월 만에 완공된 13층짜리 건물은 당시 로스앤젤레스 시의 고도 제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특별 허가를 받아 80m 높이의 시계탑으로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했다. 수직성을 강조한 파사드와 기하학적 장식 요소는 아르데코가 지향하던 도시적 세련미를 정제된 형태로 시각화한 결과였다. 특히 곡선과 직선이 조화를 이루는 모던한 디자인 요소가 가미된 이스턴 컬럼비아는 기능성과 장식을 균형 있게 아우르며 도시의 상업적 활력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날 이 빌딩은 로스앤젤레스 역사문화기념물로 보호되고 있으며, 레너베이션을 거쳐 고급 주거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매혹적인 이스턴 컬럼비아는 단지 과거의 스타일이 아닌, 살아 있는 디자인 언어로서 아르데코의 지속적 영향력을 보여준다.


NATIONAL TOBACCO COMPANY BUILDING

1931년, 뉴질랜드 호크스 베이 지역을 강타한 규모 7.8의 대지진은 도시 네이피어(Napier)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극적인 붕괴의 순간은 한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담배 재벌 게르하르트 후셔(Gerhard Husheer)는 위기 속에서도 연간 3만5000파운드의 수익을 올리며 굳건히 사업을 이어갔고, 그 자본은 도시 재건이라는 캔버스 위에 화려한 아르데코 양식을 실현하는 데 쓰였다. 그는 건축가 루이스 헤이(Louis Hay)에게 자사 본사 건물을 맡겼고, 초기 도면을 “좀 더 화려하게”라는 한 마디와 함께 되돌려 보냈다. 그 결과 탄생한 내셔널 토바코 컴퍼니 빌딩은 고전적인 아르데코 선버스트 위에 아르누보풍의 장미 장식을 덧입은 형태로 기능성과 장식의 과감한 혼합을 시도한 작품이 됐다. 아치형 출입구와 조각된 목재 문, 정교한 돔 장식 등은 당시 건축 기술과 미학이 만들어낸 디테일의 극치로, 루이스 설리번의 영향을 받은 아르데코의 수직성과 질서를 그대로 반영했다. 오랜 시간 ‘로스만스 빌딩’으로 불리며 잊혔던 건물은 국제기념물유적회의(ICOMOS)의 방문 이후 본래 이름을 되찾고 복원 작업을 거쳐 다시 주목받고 있다. 현재는 평일 일반인에게도 개방돼 세계 아르데코 수도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도시가 어떻게 재난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건축적 증거.


FIAT TAGLIERO BUILDING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 북부의 작은 나라, 홍해의 연안국이기도 한 에리트레아. 수도 아스마라의 한복판에 건설된, 활주 준비 중인 비행기처럼 양팔을 펼친 피아트 탈리에로 빌딩(Fiat Tagliero Building)은 기능성과 상상력이 교차한 아르데코의 이정표 같은 건축물이다. 1938년, 이탈리아 건축가 주세페 페타치(Giuseppe Pettazzi)의 설계로 완공된 이 주유소는 단순한 상업 시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15m 길이의 콘크리트 날개 두 개와 이를 지탱하는 중앙 타워는 명백히 비행기 형상을 본뜬 것으로, 당대 이탈리아 미래주의와 아르데코가 결합해 낳은 독창적인 형태미를 드러낸다. 중앙 탑에는 사무실, 계산대, 소매점이 들어서 있어 일종의 교통 허브 역할을 했으며, 당시 5만 대에 이르던 아스마라의 자동차들이 이곳에서 연료를 채우고 도시를 빠져나가 공항 또는 남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로 향하곤 했다. 이 빌딩은 단순한 인프라가 아니라 무솔리니 시대에 ‘아프리카 속 신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이념적 건축으로 기획됐다. 놀라운 점은 수많은 내전을 겪은 20세기 아프리카의 격동 속에서도 이 건물이 단 한 번도 손상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긴 시간을 견디며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아르데코가 지닌 낙관과 상상력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MERCHANDISE MART

거대한 리듬과 섬세한 질서. 1930년에 강변을 따라 완공된 머천다이즈 마트(Merchandise Mart)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물이자, 산업과 소비의 욕망이 건축 언어로 구현된 결정체였다. 알프레드 P. 쇼(Alfred P. Shaw)가 설계한 이 건물은 아르데코 스타일의 대표적 예로, 1920년대 미국 사회의 낙관주의와 물질적 자신감, 미래지향적 정신을 직선과 대칭, 패턴으로 정교하게 번역했다. 강철 골조 위에 석회암과 테라코타, 청동을 조합한 외관은 시대정신을 품고 있는데, 특히 리듬감 있는 수직 창과 어두운 스팬드럴, 모서리를 감싸는 팔각형 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아르데코가 어떻게 기능성과 상징성을 함께 끌어안았는지를 말해준다. 이곳은 본래 마셜 필드 백화점의 도매 창고로 출발했지만, 대공황의 그늘 아래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1945년, 조지프 P. 케네디가 이 건물을 인수하면서 머천다이즈 마트는 단순한 거래소를 넘어 또 다른 형태의 권력과 자본을 상징하게 된다. 지금도 이 거대한 구조물은 여전히 시카고 강을 내려다보며 도시의 심장부를 지킨다. 기술과 디자인, 창업 생태계가 함께 공존하는 복합공간으로 진화했지만, 그 표면에 새겨진 아르데코의 언어는 여전히 선명하다. 아르데코가 단지 화려함만 이야기하지 않으며 공간과 시대, 경제를 꿰뚫는 질서이자 욕망의 형식임을 묵직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듯하다.

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아트 디자이너 이유미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