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멕시코 전통이 이렇게나 힙했다니

멕시코의 풍요로운 생태와 전통을 재해석하는 디자이너, 페르난도 라포세.

프로필 by 권아름 2025.03.20
용설란 잎에서 채취한 섬유인 사이잘로 만든 사랑스러운 몬스터 ‘Tonahuixtla’.

용설란 잎에서 채취한 섬유인 사이잘로 만든 사랑스러운 몬스터 ‘Tonahuixtla’.


멕시코의 풍요로운 생태와 전통을 재해석하는 디자이너, 페르난도 라포세. 그의 작업은 언제나 농부들과 그들의 땅에서 시작된다. 옥수수·용설란(아가베)·아보카도 등 지역 자원을 통해 사라져가는 생물의 다양성과 농업 공동체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이를 되살릴 방법을 제시한다. 그의 디자인은 씨앗을 뿌리고, 자연이 선물하는 재료를 연구하며, 전통 기술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토지를 재생하려는 노력은 지역사회를 재생하려는 노력과 함께 진행돼요." 라포세는 디자인을 넘어 환경뿐 아니라 경제적 지속 가능성도 고려한다. 디자인계의 사회적 혁신가다운 면모로 지금도 그는 멕시코의 농촌 지역에 생태적·문화적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농업과 멕시코 전통 공예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싹트기 시작했나요

멕시코에서는 어디를 가든 공예를 쉽게 접할 수 있어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게 돼요. 특히 자연 재료와 이를 직접 재배하고 채취하는 농부들과 가깝게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죠. 이런 환경은 저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줘요.


디자인과 농업의 접점을 발견한 곳은

디자인적 사고는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고, 본질적 문제 해결과 연결됩니다. 좋은 디자인이란 단순히 아름다운 걸 만드는 게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고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저는 디자인이 멕시코의 토착 농부들이 조상 대대로 이어온 농업 방식을 유지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고민해 왔어요. 지금 함께 일하는 공동체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전통 유산이 우리가 만들어낸 초자본주의 세계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며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전통을 잃지 않으면서 혁신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죠.


전통적인 생산방식으로 복귀하기 위해 토착 작물을 디자인 소재로 끌고 왔군요

재료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한 지역과 문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매개체라고 생각해요. 합성 재료는 생명이 없고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알기 어렵죠. 반면 식물성 재료는 그 자체로 역사와 문화를 품고 있어요. 특히 옥수수 같은 작물은 멕시코 원주민에게 신성한 존재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신들이 옥수수 반죽으로 인간을 빚었다고 하죠. 게다가 멕시코는 옥수수가 최초로 재배된 곳이며, 유전자 다양성이 가장 풍부한 나라예요. 하지만 미국에서 수입된 유전자 변형 옥수수 때문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어요.


지난여름 뉴욕 프리드먼 벤다(Friedman Benda)에서 열린 전시에서 선보인 설치미술 작품.

지난여름 뉴욕 프리드먼 벤다(Friedman Benda)에서 열린 전시에서 선보인 설치미술 작품.


강아지처럼 귀여운 ‘PUP’ 벤치.

강아지처럼 귀여운 ‘PUP’ 벤치.


수호신처럼 서 있는 ‘Sisal Sanctum’.

수호신처럼 서 있는 ‘Sisal Sanctum’.


‘PUP’ 벤치에 둘러싸인 페르난도 라포세.

‘PUP’ 벤치에 둘러싸인 페르난도 라포세.


멕시코 전통 옥수수껍질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색상의 스펙트럼을 활용한 소재 ‘토토목스틀(Totomoxtle)’.

멕시코 전통 옥수수껍질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색상의 스펙트럼을 활용한 소재 ‘토토목스틀(Totomoxtle)’.


토착 재료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연구해 왔어요. 이를 바탕으로 오래된 옥수수 품종을 보존하기 위해 어떤 방안을 마련했나요

지역 농부들이 전통 옥수수를 다시 재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를 활용한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마련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를 실현하려면 먼저 사라져가는 토종 옥수수를 다시 재배해야 했죠. 씨앗 은행에 3년간 문을 두드린 끝에 지원을 받아 희귀한 종자를 확보했고, 지역 농부들과 협력해 경작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복원된 옥수수는 ‘토토목스틀(Totomoxtle)’ 프로젝트의 기반이 됐어요. 옥수수껍질을 디자인 소재로 발전시켜 나무 상감 기법을 활용해 가구를 제작했죠.


옥수수껍질뿐 아니라 용설란 잎에서 섬유를 사용해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어요

용설란은 단순한 작물이 아니라 옥수수밭을 둘러싸며 산지의 침식을 막는 중요한 식물이에요. 자연 장벽 역할을 하면서 토양과 수분을 유지하고, 척박한 땅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줘요. 그래서 일정 크기 이상 자라면 가지치기를 하는데, 식물 성장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나온 잎을 활용해 가구를 만들 수도 있죠. 공정은 단순해요. 잎을 긁어 섬유를 추출한 후, 이를 세척하고 햇볕에 표백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섬유를 사이잘(Sisal)이라고 불러요. 전통적으로 밧줄이나 그물을 제작하기 위해 매듭을 꼬아 사용되는 사이잘 섬유를 흐르는 털처럼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기법을 창조했어요. 섬유를 풀어놓은 상태로 원시적 질감을 강조하는 간단한 매듭 방식을 개발했죠. 그리고 이 섬유는 털북숭이 형태의 유쾌한 오브제로 발전했죠. 버려지는 자연 자원을 재생시키고, 동시에 시각적·촉각적으로 깊이 있는 경험을 선사하려는 목적이었어요. 이 형태는 전통 축제에서 볼 수 있는 지역 캐릭터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다양한 조각이 있는데, 그중 ‘사이잘 생크텀(Sisal Sanctum)’은 런던 동부의 도시 풍경에서 방문자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할 목적으로 설치했어요. 거대한 털북숭이 수호자가 방문자들을 감싸며 보호하는 것이죠. 그리고 사이잘을 활용해 털북숭이 형태의 벤치와 캐비닛도 만들었어요.


생물 다양성 상실, 지역 농업에 대한 주제 외에도 글로벌 무역의 부정적 영향에도 주목한다죠

아보카도껍질을 활용한 프로젝트가 그 예입니다. 미초아칸(Michoaca′n)은 전 세계 아보카도의 60%를 생산하는 지역인데, 이 산업의 급성장으로 범죄 조직이 개입하고 그로 인해 심각한 삼림 벌채와 폭력적 상황이 발생했어요. 이를 알리기 위해 아보카도 씨앗과 껍질로 염색된 40m 길이의 그래픽 내러티브 직물을 작업했죠. 이 직물은 ‘체란(Chera′n)’이라는 원주민 마을의 이야기로, 아보카도 농장주들의 착취로 숲을 잃은 마을 사람들이 자연을 되찾기 위해 일어선 과정을 담고 있어요. 또 아보카도껍질을 사용해 만든 가죽과 유사한 질감의 소재로 제작한 가구도 이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아보카도껍질을 재료로 개발해 제작한 ‘Avocado Skin Cabinet’(2024).

아보카도껍질을 재료로 개발해 제작한 ‘Avocado Skin Cabinet’(2024).


사이잘 털을 휘감은 목재 수납장 ‘White Agave Cabinet’(2021).

사이잘 털을 휘감은 목재 수납장 ‘White Agave Cabinet’(2021).


말린 루파를 활용한 플로어 램프.

말린 루파를 활용한 플로어 램프.


말린 루파를 활용한 실험적인 옷.

말린 루파를 활용한 실험적인 옷.


루파로 제작한 벤치.

루파로 제작한 벤치.


옥수수껍질을 조심스럽게 잘라 다림질해 평평하게 펴서 종이 펄프나 섬유 뒷면에 붙여 완성한 테이블.

옥수수껍질을 조심스럽게 잘라 다림질해 평평하게 펴서 종이 펄프나 섬유 뒷면에 붙여 완성한 테이블.


2019 디자인 마이애미를 핑크빛으로 물들인 ‘Pink Beasts’.

2019 디자인 마이애미를 핑크빛으로 물들인 ‘Pink Beasts’.

자연 소재를 사용하면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고, 지속 가능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나요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기 위해 광범위한 연구와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조언자는 바로 함께 일하는 원주민 협력자들이죠. 그들은 자연의 섬세한 연결을 깊이 이해하고, 지속 가능성의 의미를 잘 알고 있어요. 단순히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을 넘어 ‘재생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작업합니다. 또 진정한 지속 가능성을 실현하려면 사회적 역량 강화를 함께 고려해야 해요. 식물을 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죠. 그 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환경적 지속 가능성뿐 아니라 경제적 지속 가능성도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제 디자인의 핵심입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멕시코 토착 작물을 사용한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사회와 환경에 어떤 긍정적 변화를 가져왔나요

지난 10년간 토착민과 협력하면서 토종 옥수수 8종을 재배하고, 60만m2 땅에 15만 그루 이상의 용설란을 심었어요. 이로 인해 20가구가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었고, 마을에 공동 작업장이 설치됐죠. 용설란이 빗물을 유지해 지하수 양이 증가하고, 침식된 언덕에도 새로운 식물이 자리를 잡았어요. 이는 환경적으로 긍정적 변화를 넘어 지역사회의 경제적 안정에도 큰 기여를 합니다.


최근 새로운 소재나 작업방식을 탐구하는 것이 있다면

제 프로젝트가 평생을 두고 진행되는 작업이라 특별한 이야기가 없는 한 새로운 재료를 쉽게 탐구하지 않아요.

Credit

  • 에디터 권아름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
  • ©CITIZENM
  • PEPE MOLINA
  • COURTESY OF FRIEDMAN BENDA AND FERNANDO LAPOS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