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 목줄에서 영감을 얻어 가죽과 메탈 스터드를 결합한 시그너처 디자인 ‘콜리에 드 시엥’ 브레이슬릿과 이 디자인 코드가 오롯이 녹아 있는 바레니아 향수 보틀. 마치 향이 손목을 감싸는 듯한 정경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9월 초, 지난했던 서울의 여름을 뒤로하고 13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파리는 완연한 가을이었다. 높고 푸른 하늘에 따스한 햇살, 파리 시내를 활보하는 이방인의 등줄기에 흐르는 땀방울을 식혀줄 선선한 바람. 에르메스의 첫 번째 시프레 향수 ‘바레니아’와 마주한 에디터의 마음이 무장해제될 수밖에 없었던 건 파리의 가을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을 이끈 현대건축의 거장 로베르 말레-스테뱅스가 디자인한 ‘빌라 카브루아’의 내부. 모던한 건축양식의 프로토타입과 현대 여성의 자유와 독립성을 표현한 바레니아 향수가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을 이끈 현대건축의 거장 로베르 말레-스테뱅스가 디자인한 ‘빌라 카브루아’의 내부. 모던한 건축양식의 프로토타입과 현대 여성의 자유와 독립성을 표현한 바레니아 향수가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에펠탑과 잿빛 함석지붕이 한눈에 내다보이던 파리 8구의 에르메스 퍼퓸 오피스에서 조향사 크리스틴 나이젤(Christine Nagel)을 만났다. 인터뷰 전날, 파리에서 기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릴(Lille)에 있는 빌라 카브루아(Villa Cavrois)에서 바레니아 향수는 물론 그 안에 들어가는 향의 원료를 이미 체험했고, 파리 근교 팡탱(Pantin)에 있는 에르메스 공방에서 가죽과 이를 다루는 장인들을 만나고 돌아온 직후였기에 그녀에게 향수의 상세한 설명을 ‘직접’ 듣는 순간은 장편소설의 마지막 장(章)을 펼치는 것만큼 떨리고 설레는 일이었다. 에르메스 조향사로 부임한 뒤 ‘반드시 시프레 향수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는 크리스틴. 하지만 시프레는 프루티와 플라워, 우디 등 노트를 들었을 때 바로 연상되는 향이 아니라 ‘구조’에 가까운 향이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일반적인 시프레와는 차별화되는 시프레 향, 질 좋은 재료, 혀를 내두를 만한 디테일, 시대를 초월하는 우아함 등 에르메스의 모든 가치를 담은 ‘에르메스적인’ ‘에르메스만의’ 시프레 향을 만들고 싶었던 크리스틴은 에르메스 아카이브는 물론, 본능과 직감에 따라 세상에 맞선 페기 구겐하임이나 낸시 커너드 같은 여성 아티스트를 탐구했고, 자신에게 눈을 돌려 스스로 매료당하는 게 무엇인지 깊이 고민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정말 좋아했어요. 당시 읽었던 많은 이야기 중 불현듯 떠오른 아프리카 전설이 있었어요. 바오바브나무에 사는 한 마법사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쓰고 신 것들, 심지어 사람의 본성까지도 달콤하게 만들어주는 작은 과일이 있었죠.” 바로 그 ‘작은 과일’을 찾아 헤맨 끝에 크리스틴 나이젤이 찾아낸 것이 바로 바레니아 조향에 사용된 ‘미라클 베리’다.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을 이끈 현대건축의 거장 로베르 말레-스테뱅스가 디자인한 ‘빌라 카브루아’의 내부. 모던한 건축양식의 프로토타입과 현대 여성의 자유와 독립성을 표현한 바레니아 향수가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버터플라이 릴리와 미라클 베리, 오크우드, 파촐리 등 바레니아를 구성하는 향의 노트들.
조향사 크리스틴 나이젤이 영감을 얻은 인물, 낸시 커너드의 책과 에르메스 뷰티 제품들, 바레니아 보디크림이 놓여 있는 행사장 풍경.
원료 이야기에 앞서 크리스틴은 에디터에게 작은 열매를 입 안에 가만히 물고 있으라 했고, 향을 이루는 원료에 대한 설명은 15분가량 더 이어졌다.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산 ‘베르가못’을 사용합니다. 에르메스에만 공급하는 업체로, 일반 베르가못보다 훨씬 향이 신선하고 명징해요. 좀 더 날카롭다고 할까요. 일반적인 시프레 향에는 재스민이나 장미를 쓰는데, 저희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재배되는 ‘버터플라이 릴리’를 써요. 여성 향수에는 처음 사용되는 꽃이랍니다. 훨씬 섬세하죠. 또 오크우드에서 자라는 이끼 향을 가미했는데, 저는 그을린 오크우드를 사용해 마치 럼주 같은 관능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파촐리 역시 두 가지 파촐리 향을 가미해 강한 시그너처를 만들어냈어요. 이제 입 안에 있는 열매를 뱉고 이 레몬을 한 입 깨물어보시겠어요?” 혀를 강타한 건 레몬 과육의 신맛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달콤한 과즙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와우!”를 연발하는 에디터를 향해 크리스틴은 미소 지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제가 읽은 아프리카 전설에서 영감을 얻어 찾아낸 이 열매를 왜 ‘미라클 베리’라고 하는지 알겠죠? 미라큘린이라는 단백질이 30분 정도 미각을 잡아줘요. 잠시 동안 뭘 먹든 단맛을 느끼게 하죠. 말린 살구를 연상시키는 신비로운 과일 향을 지니고 있답니다.” 오랜 시간 작업한 끝에 탄생한 크리스틴 나이젤의 에르메스 시프레 향. 에르메스 아티스틱 디렉터 피에르-알렉시 뒤마(Pierre-Alexis Dumas) 역시 그 향에 매료됐고, 다음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시대를 앞선 건축가 로베르 말레-스테뱅스의 비전이 담긴 공간. 콜리에 드 시엥 브레이슬릿을 착용한 에르메스 우먼이 바레니아 향을 풍기며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다.
시대를 앞선 건축가 로베르 말레-스테뱅스의 비전이 담긴 공간. 콜리에 드 시엥 브레이슬릿을 착용한 에르메스 우먼이 바레니아 향을 풍기며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다.
시대를 앞선 건축가 로베르 말레-스테뱅스의 비전이 담긴 공간. 콜리에 드 시엥 브레이슬릿을 착용한 에르메스 우먼이 바레니아 향을 풍기며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다.
필립 무케(Philippe Mouquet)는 에르메스의 상징적인 콜리에 드 시엥(Collier de Chien) 브레이슬릿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어 진귀한 메탈과 투명한 곡선의 유리가 만나 마치 ‘손목에 향을 붙잡아둔 것 같은’ 보틀을 디자인했다. 상징적인 향에 꼭 맞는 상징적인 오브제가 탄생한 것. 그 다음엔 에르메스 커뮤니케이션 팀이 나섰다. 전설적인 모델 말고시아 벨라(Małgosia Bela)를 섭외해 에르메스가 추구하는 여성상, 무엇도 막을 수 없고 호기심과 열정, 본능이 이끄는 여성상으로 현현할 수 있었던 것. 그 결과물이 우리가 보고 있는 캠페인이다. 작명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에르메스 공방에서 느낀 바레니아 가죽의 우아한 감촉이었어요. 바레니아는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유서 깊은 가죽이죠. 그리고 그때 만난 장인을 떠올렸어요.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저한테 말했죠. ‘바레니아도 당신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지고 있다’고. 향수 이름은 반드시 ‘바레니아’여야 했어요. 향은 무언가를 연상하게 해야 해요. 공감각적이어야 하죠.” ‘공감각적’이라는 단어에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파리와 릴, 두 도시를 오가는 내내 맡은 바레니아 향은 에디터로 하여금 향 입자들이 질주하는 말의 갈기처럼 공기 중에 홀연히 날리다 내 살갗에 닿아 골드 컬러 바레니아 가죽이 되는 황홀한 정경을 연상시켰기 때문. “일반적으로 ‘살냄새’라는 향수에는 알데하이드와 머스크, 암브록산 등 깔끔하고 청결한 느낌을 주는 재료가 쓰입니다. 저는 그보다 살결의 부드러움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전 향수가 피부에 녹아드는 걸 좋아하거든요. 향수를 뿌렸을 때 그 향에 갇혀 있는 느낌과는 달라요. 마치 보디크림을 바르듯 피부에 녹아드는, 매우 감각적이고 관능적이죠. 바레니아 가죽이 아름다운 파티나(Patina)로 정평 나 있듯 바레니아 향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진하고 강한 향은 섬세함을 놓치기 쉬워요. 마치 음식이 너무 맵거나 뜨거우면 본연의 맛을 느끼기 힘든 것처럼요. 바레니아 향수는 그런 면에서 딱 적당합니다. 확실한 시그너처를 지니고 있으면서 뿌리고 나면 피부에 녹아들어 매우 섬세한 아우라와 흔적, 일종의 파티나를 남겨요. 최신 트렌드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전 그게 좋아요.”
바레니아 오 드 퍼퓸, 30ml 11만8천원, 60ml 19만3천원, 100ml 27만원, Hermès.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말고시아 벨라가 등장한 캠페인에 쓰인 메인 카피가 뇌리를 스쳤다. ‘La peau est un parfum.’ ‘피부는 향이다’로 직역할 수 있지만, 직유와 은유를 넘나드는 크리스틴 나이젤의 설명을 들은 나는 이 캐치프레이즈가 의미하는 메타포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우스의 전통이 담긴 가죽 이름을 지닌, 여인의 손목을 감싸며 피부에 안착해야 비로소 그 본색이 드러나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향이 바로 바레니아임을. 이제는 바레니아 향이 당신의 살갗에 스미는 순간, 그 공감각적 매력을 만끽할 순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