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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도 생산적으로

프리랜스 에디터 김정현. 주로 도시의 흥미로운 장소와 콘텐츠를 소개한다. 취향에 관한 에세이 <나다운 게 뭔데>를 썼다.

프로필 by 윤정훈 2024.10.22
빔즈 신주쿠를 나섰을 때 시계는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애인 선물을 사가겠다고 폐점 시간까지 매의 눈을 켜고 돌아다닌 참이었다. 허기가 몰려왔다. 저녁이나 먹자. 그리고 하루키가 단골이었다는 DUG로 향하는 거야. 재즈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숙소로 어슬렁어슬렁 돌아가면 5박6일 간의 도쿄 여행도 끝이 난다. 잠깐, 피자 슬라이스는? 여행 오기 전부터 꼭 가봐야겠다고 벼르고 별렀던 가게 말이다. 사진에서부터 느껴지는 ‘쿨’하고 세련된 매장 분위기부터 먹음직스러운 뉴욕식 피자의 비주얼까지, 내가 이곳과 사랑에 빠질 것이란 사실은 지나가는 시바견도 알 터였다.

동선만 따지고 보면 이보다 비효율적일 수 없다. 한 시간 전만 해도 거리를 배회하던 다이칸야마로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니까. 식사를 마친 후엔 숙소가 있는 신주쿠로 돌아와야 한다. 이미 체력은 바닥이요, 더럽게 비싼 지하철 요금을 또 내야 하다니. 고민에 빠졌다. 할까 말까 싶을 때는 하고, 갈까 말까 싶을 때는 가자는 게 내 평소 지론이다. 지론이고 나발이고 당장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거길 가? 인파 속에서 머리를 굴리던 나를 움직인 건 어디선가 들려온 단호한 목소리. ‘후회한다, 너. 여기 쉬러 왔어?’

깜빡했다. 도쿄 여행의 목적이 휴식이 아니었다는 걸. 한동안 일이 줄어 설렁설렁 일상을 보냈으니 내게 쉴 자격 같은 건 없었다. 그럼 일하러 갔냐고 물으면 목소리가 작아진다. 나는 경비를 대며 출장을 보내줄 회사가 없는 프리랜서이기도 하고, 출장을 보내줄 클라이언트도 없는 영세한 프리랜서다. 따라서 열심히 놀기 위해 떠났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적절하긴 하나 멋은 없는 말. 멋을 조금 더해 말하자면 ‘생산적으로’ 놀기 위해 떠났다. 보고 싶은 것 보고 경험하고 싶은 것 경험하되, 그걸 직간접적으로 일과 연결하며 놀고 싶어서. 거창하게는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도쿄로 ‘셀프 워크숍’을 다녀왔다.

‘내돈내산’ 도쿄 셀프 워크숍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한 치 앞도 예상하기 어려운 프리랜서의 앞날에 활로를 뚫어보려는 노력이었다. 잘 안 풀릴수록 기회를 만들어줄 과감한 선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니까. 기회는 움직이는 자에게만 닿는다. 나는 그걸 잡고 싶었고, 그래서 뭐라도 하자 싶었고, 그 와중에 놀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세 욕망이 만나 도출된 결과다.

도쿄는 내 구글 맵에 가장 많은 핀이 꽂혀 있는 도시다. 궁금한 카페와 식당과 편집 숍과 서점이 넘쳐났다. 하나하나 가보는 것도 좋은 자극이 될 테고, 한국 관광객의 방문 수요가 높은 만큼 추후 도쿄의 로컬 매장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선보이면 반응이 괜찮을 거라고 기대했다. 무엇보다 비용 면에서 감당 가능한 수준이었다. 런던 워크숍, 베를린 워크숍이야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현 재정 상태에서는 사치가 분명했다. 프리랜서 생활의 이점은 제안과 승인, 실행과 평가 모두 혼자 알아서 하면 된다는 것이다(정확히 그 이유로 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동료와 출장을 떠나고 워크숍을 가는 직장인을 부러워했던 나는 큰맘 먹고 결심했다. ‘김정현 씨, 도쿄 보내줄게. 가서 좀 제대로 느끼고 와봐.’

그리하여 시모키타자와에 도착한 첫날부터 신주쿠를 쏘다니던 마지막 날까지 김정현 씨의 워크숍은 연일 강행군을 이어갔다. 모닝커피로 시작한 하루는 소울 음악이 울려 퍼지던 레코드 바의 생맥주로 마무리됐다. 낮에는 손에 쥐고 다니던 카메라 셔터를 쉴 틈 없이 눌러대는가 하면 밤에는 호텔 방 책상 앞에 앉아 그날의 일정과 방문지 특징, 에피소드를 정리하느라 노트북 자판을 두들겼다. 음식 맛은 기본에 친절한 서비스까지 겸비한 동네 식당은 긴장과 피로를 물리칠 따뜻한 마음을, 인테리어와 제품 큐레이션 모두 만족스러운 편집 숍은 얼른 콘텐츠로 만들어 소개하고 싶은 기분 좋은 조바심을 선물했다. 틈나는 대로 매장 운영자나 스태프들과 스몰 토크를 시도한 끝에 현지 친구를 사귀게 된 건 나름 뿌듯한 성과다.

‘워크숍 호소 여행’은 결과적으로 출장 역할까지 했다. <엘르 데코>를 포함해 3개 매체에 도쿄에 대한 이야기를 실은 것이다. 개인 인스타그램에 올린 숏폼 콘텐츠 누적 조회 수는 60만 회를 넘겼다(영세 인스타그래머에게는 엄청난 수치다).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쉬자는 마인드로는 택도 없었을 일이다. 하나라도 더 건져보자는 결기로 검색하고, 이동하고, 만나고, 먹고, 사고, 기록했기에 가능했다. 일이 없으니 만들어서 오겠다는 허세 섞인 각오가 현실이 됐다. 나는 용기를 얻었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건 단순한 물리적 이동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뚜렷한 목적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간다면 말할 것도 없다. 그곳에서 내가 만나고 경험하는 것은 자꾸 나를 또 다른 형태의 만남과 경험으로 데려간다. 중요한 건 이 연결과 연결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오늘 여기에서 보이기는커녕 상상할 수도 없었던 새로운 기회가 내일 거기서 나를 기다릴 거라고 믿는 것.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뒤 내가 알게 된 건 나의 결단과 실천에는 어쭙잖은 짐작과 판단을 뛰어넘는 가능성이 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실감이야말로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서 마음을 잡아줄 선례가 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만든 듬직한 레퍼런스가. 내년에는 런던이나 베를린 워크숍을 떠나도 괜찮지 않을까?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