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 바글바글한 여섯 식구 틈바구니에서 자란 탓에 한번도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와 부모님, 남동생에게 방이 하나씩 주어지고 나면 나는 늘 언니와 한방. 이층침대에 위아래로 누워, 기숙사에 사는 여학생들처럼 잠이 들곤 했다. 언니가 시집간 후 독립해 회사 근처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지만, 내 방을 갖게 됐다고 말하긴 곤란하다. 침실과 거실과 부엌의 구분이 없는 원룸에 방이란 건 없으니까. 방금 끓여 먹은 라면냄새로 가득한 공간을 바랐던 건 아니었다. 생존과 별개로 마련된 공간, 다만 조용히 쉴 수 있는 작은 방을 원했다. 3년 전 결혼한 뒤 ‘우리’의 공간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는 재미를 알게 됐다. 결혼한다는 건 누군가와 모든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 그래도 가끔 홀로 있고 싶을 때가 생긴다(기혼자들이여, 제 말이 틀립니까?). 그런 갈증이 생길 때면 욕조로 가 눕곤 했다. 커다란 잔에 찬물을 가득 담아 들고 욕실로 향한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거품을 만들고 그 안에 누워 가벼운 에세이 몇 편을 읽으며 찬물을 홀짝이면, 그야말로 마음 가득 편안해진다. 내가 아는 최상의 고요. 꼭 독서를 하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목적은 독서도 목욕도 아니다. 거품속에서 멍을 놓는 것이야말로 내가 누리는 가장 훌륭한 사치였다. 건축가를 처음 만난 날. 우리 부부의 생활 패턴과 집의 구조에 관한 대화를 하던 중, 그가 나를 보며 대뜸 물었다. 혹시 꼭 원하는 무언가가 있느냐고. 나는 망설임없이 답했다. “욕조요..”아래채의 왼편, 아궁이를 지나 뒤로 돌아 들어가면, 푸세식 화장실이 나온다(화장실 사진은 모두를 위해 생략).이 집에는 오수처리시설이 없었다. 화장실이 푸세식이었다는 뜻이다. 아래채 뒤편 구석에 은밀하게 달린 작은 나무문. 그건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었다. 신비롭고 놀라운 악취의 세계(!)로 통하는 문. 들어가 두 발을 디디고 발 밑 나무판 아래를 내려다 보면, 블랙홀처럼 깊고 아득한... 후... 여기까지 하자. 서로 괴로우니까. 아무튼 이 집을 고칠 때 반드시 해야할 일이 바로 마당에 정화조(오수처리시설)를 묻는 것, 그리고 화장실과 욕실을 신설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욕실을 리모델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 수 있다는 건 아무런 제약이 없다는 뜻. 고민은 오히려 깊어졌다. 어떤 욕실을 만들 것인가. 나는 욕조를 원하고 남편은 건식화장실을 원했다. 건축가의 묘수는? 욕실과 화장실과 세면대를 분리하는 것. 보통의 아파트에는 한 공간에 변기와 세면대, 그 옆에 욕조가 나란히 놓이기 마련인데, 이 세가지를 따로따로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영화 속 목욕장면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구조다. 목욕 문화가 발달된 일본의 경우 욕실과 화장실을 분리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변기 윗부분에 손을 씻을 수 있는 세면대가 달려있기도 하다). 이같이 분리된 구조라면 목욕하는 동안 방해받지 않을 수 있고, 화장실 바닥이 물로 질퍽거리지 않을테니, 나와 남편 둘 다 만족할 만한 선택. 독특한 구조 때문인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불편한 점은 없나요? 글을 쓰고 있는 현재, 2주동안 사용해 본 결과 장점과 단점 각각 두 가지를 발견했다. 단점으로는 양변기에 물을 끼얹어 시원시원하게 청소할 수 없다는 것(청소용 티슈를 사용하면 된다)과 나무로 만든 세면대 가구를 사용하는 데 매우 조심스럽다는 것. 그렇다면 장점은? 오가며 수시로 손을 씻을 수 있다는 것(손씻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부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장점 하나. 혹시나 남편이 화장실에 가고 싶어하지 않을지 전전긍긍할 일 없이, 느긋하게 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아아, 나란 사람은 단순하여 그 장점 하나로 모든 단점이 상쇄되고야 마는 것이다.(왼쪽)욕실 조적(벽돌쌓기)을 마친 모습. 안방에서 바라 본 욕실 출입문과 창문. (오른쪽)욕실에는 환풍기를 설치하지 않고 창문으로 자연환기할 수 있게 설계했다. 욕조에 누우면 작은 창문을 통해 지리산과 하늘을 볼 수 있다.(왼쪽)작은 건식 화장실을 위한 공간. 구조상 없앨 수 없는 기존의 기둥 옆에 하나의 변기가 놓일 예정이다. (오른쪽)타일공사 전, 욕조의 자리를 마련하고 조적(벽돌쌓기)을 하는 모습.(왼쪽)타일공사와 설비공사를 마친 화장실. 원래 제 자리였다는 듯 양변기가 앉아있다. 건식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기존의 나무기둥을 그대로 두는 데 무리가 없었다. (오른쪽)화장실 문 바로 옆에 마련된 세면대 자리. 아카시아 집성목으로 가구를 제작했다.(왼쪽부터)여배우의 후광을 받으며 큰일을 볼 수 있는 화장실, 아카시아 나무로 제작한 세면대, 오직 목욕만을 위한 욕실.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