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때로 단단하게, 때로 유연하게 삶을 지탱해 주는 집

건축을 공부하고 디자이너로 일했던 김윤선이 만난 다양한 집의 잔상들.

프로필 by 윤정훈 2024.01.17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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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이 세입자를 구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집은 반대로 세입자가 집주인을 구한 집입니다.” 인터뷰이의 말에 입꼬리가 먼저 반응했다. 속된 말로 ‘야마’를 발견하는 순간. 주제에 맞게 글을 쓰고 마감해야 하는 숙명의 에디터라면 응당 희열을 느끼는 순간일 터. 스스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좇은 이가 덤덤하게 내뱉은 문장에 뜻 모를 벅차오름을 느꼈다.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지인이자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취향 공동체 세 가족이 모여 사는 이 집은 땅을 알아보고 건물을 설계하는 집짓기의 모든 과정을 건축주가 아닌, 세입자들이 결정했다. 시세보다 낮은 임대료와 10년간의 장기점유를 보장받는 것을 전제로. 이들이 저마다 옛집을 떠나 이 낯선 공간과 처음 마주한 순간을 상상했다. 정형화된 집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주체적 삶의 방식, 집을 통해 타인과 관계 맺는 방법마저 새롭게 깨달았다는 이야기는 긴 여운으로 남았다. 
 
“제겐 화장실이 침실만큼이나 중요한 공간이에요.” 20평 남짓한 땅에 네 개 층으로 올린 신혼부부의 집엔 다소 넓게 느껴지는 화장실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남편, 하나는 아내의 것이었다. 화장실이 두 개인 집이야 특별할 게 없지만, 문을 두 개나 내 양방향으로 접근할 수 있고, 순환 동선을 만들어 생활의 중심에 두었다는 점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화장실 한편에는 욕조와 세탁실이 있고, 세면대 쪽엔 커다란 창문이 나 있어 조명을 밝히지 않아도 환했다. 층당 7평쯤 되는 공간에 상당 부분을 차지한 화장실을 보며 당시 살던 내 원룸 오피스텔의 화장실을 떠올렸다. 인체 치수를 고려해 치밀하게 짠 평면. 세면대와 변기 사이 좁은 틈에 익숙해진 탓일까. 환풍기 소리에 이따금 신경이 곤두서도 큰 불만 없이 살아온 것은 ‘최적화’의 탈을 쓴 ‘최저가’에 속은 것일까. 자주 쓰는 물건은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야 한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 공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우리에겐 가끔 ‘잊는 일’이 필요해요. 그러려면 예상 밖의 일이 생길 틈이 있어야 해요.” 은퇴 후 한적한 동네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한 미술사학자의 집. 평생 박물관에서 일한 그는 어렵사리 모은 책과 도록마저 주변에 나눠주고 짐 없는 간소한 일상을 보냈다. 벽과 문 없이 가로 9m, 세로 9m의 정사각으로 된 한 칸 집. 벽과 천장을 덮은 미색의 초배지는 욕망하지 않고 사는 법에 대해 말하는 듯했다. 바닥엔 3m 간격으로 ‘정(井)’ 자 문틀이 새겨져 있었다. 그 위로 여덟 개의 미닫이문이 움직이며 아홉 개의 칸을 만드는데, 주인은 아무 물건도 없이 비어 있는 정중앙 칸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빈 공간이 있어 사방팔방으로 통할 수 있고, 집에 여유를 준다는 이유였다. 쓸모가 없는데 쓸모 있는 공간이라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한 칸의 수납공간보다 고작 한 뼘의 여지(餘地)가 아닐까. 
 
“화분도 놓고 커피도 마실 발코니가 있는 집. 숲이 보이면 더 좋고.  근데 서울이어야 돼.” 
 
결혼을 준비하며 최근 몇 개월간 신혼집을 구하러 다녔다. 원룸이나 오피스텔이 아닌, 번듯한 둘만의 집. 처음에는 막연히 숲이 보이는 테라스가 있는 집을 꿈꾸고, 멋진 카페가 있는 동네에 가면 마음이 동했다. 그러다 특례보금자리론을 벗 삼아 ‘작지만 똘똘한 한 채’를 목표로 서울 아파트 찾기에 열의를 불태웠다. 역과의 근접성, 마트와의 거리, 학군도 살폈다. 당장 나와 상관없는 것들이 모두 내 일처럼 분주해졌다. 영끌도 욜로도 아닌 회색 지대에서, 사소한 희망과 중대한 절망이 번갈아 우리를 괴롭혔다. 게다가 이젠 혼자가 아닌 둘. 의견을 합의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결국 회사와 멀지 않은 곳에 수리할 데 없는 아파트 전셋집을 구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간의 숙고가 조금은 무색하다. 하지만 우린 안다. 이 또한 우리의 선택이며, 살아가는 방식엔 어떤 정답도 없다는 것을. 그저 내 목소리에 집중해 대안을 찾을 뿐이라는 것도. 그간 만난 집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모두 나와 같은 지난한 터널을 지나왔으리라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가벼워진다. 발코니는 없지만 넉넉한 베란다가 있는 집. 숲이 보이지 않지만 근처에 공원이 있는 집. 서울은 아니지만 서울과 가까운 집. 입주 후 꼭 열흘이 지난 오늘, 창밖의 단풍나무가 어제보다 붉어졌다. 완연한 가을이 왔구나. 이곳에서 마주할 몇 개의 계절을 생각하며 새로운 기대에 젖는다.
 
김윤선
에디터이자 콘텐츠 기획자. 건축을 공부하고 디자이너로 일했다. 새로운 아이디어에 관한 탐구와 기획을 즐기고, 집과 가구를 좋아한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민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