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엘르보이스]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
누구나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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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lash
누구나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이 있을 것이다. 새 다이어리를 사는 사람도 있을 테고, 신년 운세를 보는 사람도, 헬스클럽 이용권을 끊는 사람도 있겠지. 풍요와 기대가 공기 중에 잔잔히 떠돌고, 오늘의 실수도 내일이 되면 전부 용서될 것 같은 넉넉한 세밑. 그러나 온 세계가 낙관으로 가득 찬 이 시기에 나는 공연히 울적해진다. 그도 그런 게 나에겐 이상한 징크스가 있다. 1월 1일 새해가 다가오면 여지없이 크고 작은 사고가 벌어진다. 평소 조심성이 없거나 삶에 변수가 많은 편도 아닌데 말이다. 지난 4년간 연말에 일어난 불운을 돌아보자. 2019년, 새해를 앞두고 아버지와 등산을 갔다. 컨버스를 신은 게 문제였을까. 하산하던 길에 발목을 접질렸고, 결국 아버지에게 업혀 내려왔다. 2020년. 겨울을 맞아 보령에 내려가 굴을 먹었다. 싱싱하고 맛도 좋았는데, 뭐가 문제였는지 노로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그해는 화장실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2021년에는 주차하다 벤츠를 긁었다. 머리털이 곤두선다는 게 단순한 관용어가 아님을 맹렬하게 체감했다. 2022년. 숙원이었던 일본 기차여행을 위해 촘촘한 계획을 세웠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육안으로 느끼고 싶어 여비를 모으고 숙소와 비행기 티켓까지 끊었다. 새해를 눈의 고장에서 보내다니 이것이야말로 진정 복된 새해가 아닐까 했는데 출국 사흘 전 코로나19에 걸렸다. 입국 규제가 철저했던 시기라 국경은커녕 현관문도 나서지 못한 채 칩거했다. 적지 않은 취소 수수료와 절망만 남은 새해. 침대에 누워 쳇 베이커의 음악을 들었다. ‘내가 골프 약속을 잡으면 늘 비가 와요. 파티를 열려고 하면 윗집에서 불평부터 하죠. 아마도 내 인생은 감기에 걸리거나 기차를 놓치는 불행의 연속일 것 같아요. 어떤 것도 날 비껴가지 않죠.’ ‘Everything happens to me’의 가사처럼 심상히 넘기기도 어려운 불운들. 서글픔에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 올렸다.
그래서일까. 의식적으로 몸을 사릴 수 밖에. 올해는 독감에 걸리려나? 맹장이 터지지 않을까? 차곡차곡 쌓여온 데이터가 올해 닥칠 불운을 스포일링하는 것 같아 초조해진다. 일찌감치 예방주사를 맞고, 약속을 미루거나 취소하고, 타이어 공기압도 점검한다. 생각해 보면 내 삶은 자잘한 징크스로 가득한 것 같다. 소설을 발표하기 전 누군가에게 작품을 보여주면 결과가 좋지 않거나, 황색 신호에 교차로를 지나면 그날은 운수가 사납고 중요한 날에는 검은색 옷을 입어야 한다. 어쩌면 한 해를 알차게 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 더 잘 살고 싶다는 열망, 미래를 향한 불안이 자진해서 징크스를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마마스 건의 ‘This is the day’ 역시 징크스에 관한 노래다. 1절에서는 자신의 불행을 나열하다 2절부터 불운을 낙관으로 돌파한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 기분. 어제는 완결된 이야기고, 인생의 막이 올랐어요. 저주가 풀린 것 같아요’ 라면서.

ⓒCOSMOH LOVE
일 년.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 곡식이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익어가는 시간. 아픔과 고통, 슬픔을 넘어서며 계속 살아내는 시간. 그렇게 가늠해 보면 살아간다는 게 참 대견하고 아름답다. 올해에는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감정을 느낄까? 징크스라 부르며 회피했던 내 부족한 면면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제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세밑을 기다린다. 완결된 어제는 뒤로하고 새로운 시작을 반갑게 맞아들일 마음으로.

소설가.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 <두고 온 여름>을 펴냈다. 깊이 쓰고, 신중히 고치며 나아가려 한다.
Credit
- 에디터 이마루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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