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내가 평생 풀고 싶은 문제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엘르보이스] 내가 평생 풀고 싶은 문제

실비아헬스 고명진 대표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

이마루 BY 이마루 2023.08.30
 
Ekaterina Shakharova

Ekaterina Shakharova



내가 평생 풀고 싶은 문제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덕분에 50대부터 80대까지 노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신체적·심리적 문제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조부모님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부터 은퇴 후 신체적·인지적 기능이 저하되는 여정을 함께하며 깨달은 것은 노화 문제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 예를 들어 사회적 기능이 떨어지면 신체와 정신에도 영향을 미치고, 신체 기능이 저하되어 사회적 기능을 잃기도 하며, 정신 기능의 변화가 신체 기능의 변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도 잃게 될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
 
이런 깨달음은 창업 후 우리 서비스의 핵심가치인 ‘연결’을 설정하는 데 큰 영향을 줬다. 내가 중학생일 때 큰 수술을 받은 이후, 할아버지는 사회활동을 점점 정리하셨다. 할아버지의 신체 기능은 예전과 달라졌지만 생활 루틴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매일 아침 6시가 되면 근력 운동과 영어 공부를 하셨고, 80대가 된 지금도 그 규칙을 지키고 계신다. 늦깎이 대학원 생활을 한 할머니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항상 배움에 열정적인 두 분이 내 인생의 롤모델이자, 이상적인 미래상이 된 건 당연한 수순이다.  
 
경제학도로서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 ‘노동경제학’ 같은 수업을 들으며 고령화와 사회적 약자에 관한 관심이 나날이 커져만 갔다. 경제와 고령화 현상에 관한 논문을 써야 했을 때, 정설처럼 여겨지던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면 생산인구가 감소하고 경제성장도 둔화된다’는 사실에 나는 완전히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내세웠던 가설을 입증하지는 못했지만 고령인구가 늘어나도 기술로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 인류라면 누구나 겪는 노화가 사회의 짐으로 여겨지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당시의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  
 
Dominik Lange

Dominik Lange

 
의대에 진학한 이후에는 독거노인 방문 진료봉사를 시작했다. 의대생이 할 수 있는 건 혼자 사는 어르신들의 혈압을 재고 간단한 인지검사 정도라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배우는 수업료에 비하면 내 역할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시기, 치매를 향한 어르신들의 공포가 얼마나 큰지도 알게 됐다. 많은 분들이 작은 징후에도 치매는 아닐까 우려했고, 이구동성으로 암보다 치매가 무섭다고 했다. 치매가 우리 사회의 거대한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언젠가 누군가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다. 당시만 해도 ‘먼 일’로 생각했던 치매가 내 삶에 ‘훅’ 들어온 것은 본과 1학년을 마칠 즈음 할머니께서 치매검사를 혼자 받으러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다. 의대생 손녀에게 건강에 관한 사소한 문제를 상담하던 할머니가 이 문제만큼 혼자 끙끙 고민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봉사 프로젝트를 계속할수록 고민도 커져갔다. 독거 어르신들이 봉사자가 보이지 않으면 얼마나 아쉬워하는지, 내게는 일상의 한 조각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전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봉사의 ‘지속성’을 높일 수 있는 ‘비대면 봉사’가 아이디어로 떠올랐고, 노인들께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하고, 인지 자극에 도움이 되는 12주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 교육이 효과적일 수 있도록 봉사자 교육 매뉴얼을 개발하고 임상 전문가를 초청해 어르신과 소통하는 방법, 인지 자극에 대한 이론 교육을 진행하며 통화 상담의 품질을 높여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한 봉사자의 활동보고서가 눈길을 끌었다. ‘지난번 통화에서 허리가 안 좋다던 어르신께서 오늘은 계속 괜찮다고 하신다. 정말 괜찮은 건지, 내가 걱정할까 봐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다.’ 음성만으로 심리상태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고서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이었다. 이 아이디어의 실행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문헌을 찾았고, 이미 미국에는 정서 상태뿐 아니라 치매를 판단할 수 있는 기술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많은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텐데.
 
마침내 등을 떠밀어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비대면 의료 봉사가 입소문을 타고 처음에 여섯 명이던 봉사자가 60명을 훌쩍 상회하게 된 것. 대학시절에 모아둔 비용만으로 프로젝트 규모를 감당할 수 없게 됐다. 그때 나를 구원한 것이 19개 금융기관이 설립한 창업 지원 프로그램 ‘디캠프’와 서울대 의과대학이 함께 기획한 공모전 포스터였다. 만약 포스터에 ‘창업 경진대회’라는 글자가 대문짝 만하게 적혀져 있었다면 스타트업이나 창업과는 거리가 먼 나는 지원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라는 문구는 용기를 줬다. 기쁘게도 ‘통화 목소리를 통해 정신건강을 살피는 서비스, 실비아’로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기사를 본 팀원들이 하나둘 합류하다 보니 이 작은 프로젝트가 어엿한 법인이 돼 있었다.
 
고명진 대표와 실비아헬스 직원들이 함께있는 모습.

고명진 대표와 실비아헬스 직원들이 함께있는 모습.

 
창업 초기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어려웠다. 학교생활만 하던 내가 기업의 대표가 되다니! 스스로 채찍질할 때마다 든든한 지원군이 돼준 팀원들 덕분에 지금은 제법 IT회사 대표처럼 말할 만큼 성장했다. 2020년 7월에 출발한 실비아헬스 팀은 치매 극복 선도 기업, 보건복지부 장관상 수상자로 선정됐고 지금은 한국과 미국에서 임상 연구를 진행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치매 학회인 ‘AAIC 2023’에 제품이 소개됐고, 공공기관과 보험사 고객을 확보했다. 나와 팀원들이 가장 뿌듯할 때는 땀 흘려 만든 솔루션을 사용한 어르신들과 환자들의 진심 어린 고마움이 피부에 와닿을 때다. 함께해 준 팀원들 덕분에 노화가 두렵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비전에 매일매일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지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다른 창업가들의 존재는 큰 힘이 된다. 까르띠에 여성 창업 이니셔티브도 마찬가지다. 2006년부터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여성 창업가들을 진심으로 지원하고 있는 까르띠에 여성 창업 이니셔티브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인연 덕분이다. 프린스턴 대학교 동문인 조연정 선배는 은퇴자를 한국어 강사로 채용하는 스타트업 모델을 통해 2019년, 까르띠에 여성 창업 어워드를 수상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수상이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인 문우리 선배는 정신건강 전문의들이 참여한 심리 케어 서비스 ‘마인들링’으로 올해 어워드에서 동아시아 부문 1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사회에 기여하는 사업 모델을 만드는 여성 창업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어워드가 매년 열린다는 것은 굉장한 영감이자 응원이다. 때때로 “누군가 치매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와 만나는 상상을 한다. 가능하다면 “이 문제는 한 명이 아닌 많은 사람과 힘을 합쳤을 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창업 이후 매일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다. 우리 가족과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여정을 내일도, 모레도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것. 오늘의 내가 감사하고 가슴이 뛰는 이유다. 
 
 
고명진
비대면 인지 건강 관리 솔루션을 제공하는 실비아헬스 대표. 경제학을 전공하고 의료봉사활동으로 사람들을 가까이서 관찰하다가 결국 의대에 진학했다. 2020년 치매 검진과 관리를 책임지는 실비아헬스를 통해 창업에 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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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이마루
    디지털 디자이너 장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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