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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레이 카와쿠보의 의외로 마케팅 부서에서 일을 시작했다. 스물네 살 무렵 광고부에서 일하던 그녀에게 TV광고 스타일링을 담당해보라는 제안이 들어왔고 점차 그 일에 빠져든 카와쿠보는 프리랜서 스타일리스트로 독립을 선언한다. 이것이 바로 일본 최초의 스타일리스트의 시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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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쿠보는 ‘꼼 데 가르송(Comme des garcons)’이란 브랜드로 일본의 패션계를 이끌며 성공적인 길을 걸었다. 그녀에게 세계 시장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파리 패션쇼에서 카와쿠보와 요지 야마모토를 초청한 것. 시작은 아주 작았다. 소규모의 컬렉션을 제작해 6명의 모델들에게 입혔고 쇼는 호텔 방 안에서 이뤄졌다. 쇼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다. 비평가들은 비대칭 컷과 너덜너덜한 미완성의 의상들을 두고 원자폭탄의 후유증, 히로시마 시크라고 비판했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서구 패션에 대항하는 안티 패션은 충격과 이슈 그 자체였던 것. 그러나 신랄한 비평은 곧 ‘추(醜)의 미학’으로 해석되며 새로운 패션을 구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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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카와쿠보는 고집이 세고 완고한 아방가르드 시각을 지닌 디자이너였다. 다시 태어나면 디자이너를 하지 않겠다며 고개를 젖는 그녀지만 일년 365일, 강하고 새로운 옷을 만들기 위한 패션 철학은 여전하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그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여느 디자이너들과는 다른 새로운 소재와 신선한 조합에 힘쓴다. 매 컬렉션마다 자신이 직접 직물은 디자인하고 수공예적 기법을 이용한 독창적인 소재를 만들어왔다. 동일한 소재를 반복해서 쓰거나 한 번 사용한 부자재를 다시 쓰지 않았다. 혁신이라 일컫는 그녀의 도전과 실험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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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카와쿠보는 글래머러스하고 아름다운 패션이 주를 이뤘던 파리를 강타한 핵폭탄과 같은 존재였다. 너덜너덜하고 찢어진 의상들은 혹평을 받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패션계는 카와쿠보의 새로운 패션 미학의 놀라움을 발견했고 그 전위적인 의상들에 빠져들었다. 지금도 그녀의 전위적인 의상들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인터뷰에 당최 나타나지 않는 그녀가 한 마디 내뱉은 말을 되뇌며 컬렉션을 보고 해석한다. 꼼 데 가르송은 곧 레이 카와쿠보 자신이며, 컬렉션, 매장, 그 외의 모든 것은 그녀를 표현하는 분신과 같다. 현재 아방가르드 패션 철학의 명맥을 소신 있게 이어가고 있는 앤트워프 3인, 마틴 마르지엘라, 앤 드뮐미스터, 드리스 반 노튼은 모두 레이 카와쿠보의 영향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최고의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이 되며 진정한 패션의 선구자라 불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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