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친구이며 동료인 황효진 작가와 함께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라는 책을 출간했다. 팬데믹 첫해의 봄에서 여름 사이, 서로에게 번갈아 보냈던 편지를 담은 이 책을 우리는 ‘우정’에 관한 책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돌이켜보니 정말 그랬다. 한 시절 동안 시간과 마음을 나누고,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상상해 보는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우정 말고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책을 낸 후 함께 진행하는 팟캐스트 〈시스터후드〉에서 효진은 이런 말을 했다. “이나 님은 우정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최고의 칭찬이라며 고마움을 전하고 넘어갔지만, 이 말을 덧붙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내가 우정에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이기적이어서다. 나는 오로지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는 사람이다. 친구들과 시간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유는 하나. 그들을 가장 좋아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제일 즐겁기 때문이다. 공자식으로 표현하자면 우정의 락지자(樂之者)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내게는 생애 주기별 친구 모임이 있다. 한국 사회가 기대하는 생애 주기를 따라간 적은 없지만, 개인의 인생에 대나무 마디와 같은 흔적을 만들어 한 시절을 구분한다면 시절마다 친구들이 있었다. 살아가는 방식과 살고 있는 지역, 직업과 상황, 모든 게 다른 내 친구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어느 날 내 인생에 나타난 후 대나무 마디와 같은 시기를 함께 지나갔다. 대나무의 마디는 대나무가 키를 더 자라게 하지 않는 시기에 생겨난다. 꿈이든 사랑이든 일이든 건강이든 상실이든, 자라지도 못하고 잘하지도 못하는 나를 견뎌야 하는 시기를 같이 지나고 나면 다시 자라나는 한 시절이 생긴다. 억지로라도 웃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운 시절마다 내게는 나와 함께 웃어준 친구들이 있었다. 그렇게 친구가 되고 나면 이후에도 쭉 친구로 지낸다. 서로에게 시간을, 시간이 부족할 때는 마음을 쓴다. 친구로서 내가 하는 일은 그게 전부이고, 모두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오늘 나에게 벌어진 일을 알리는 것, 생일 축하 파티나 삶의 이벤트를 함께하는 것, 만나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오늘이 어제가 될 때까지 내내 떠드는 것을 좋아한다. 친구들과 함께 놀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제일 재미있다.
그렇다고 우정이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정은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사랑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어린 시절에 만나야 진정한 친구라든가, 일하며 만난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속설은 친구들과 나의 관계를 통해 거의 다 반박할 수 있지만, 이건 내 경우일 뿐이다. 결국 우정을 유지하고 친구들과 관계를 오래 이어가려면 ‘그러고 싶어야’ 한다. 다른 인간관계처럼 시간과 마음을 쓰되, 내가 쓴 만큼 돌려받으려 하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친구는 살아 있는 사람, 따라서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친구야말로 1:1의 관계이며, 가장 평등해야 하는 사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우정의 가장 멋진 점이자 어려운 점이다. 삶을 이야기에 비유해 나와 친구들의 관계를 설명해 보자면 일단 등장인물이 많다. 그리고 한번 등장한 인물은 웬만해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 삶의 이야기에 계속 자기 몫의 대사를 가진 사람들. 등장하고 활약한 이후로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계속 나온다는 게 중요하다. 제일 재미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삶은 이야기가 아니다. 친구 한 명이 내 이야기에서 갑자기 퇴장한 뒤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데, 그 이유를 몰랐을 때 나는 이야기의 빈 곳을 메워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이해가 되지 않고 설명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내가 알게 된 것은 우정이야말로 지키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다른 정의를 내리는 마음,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이, 필요하고 원하는 정도가 전부 다르기 때문에 어려운 관계가 바로 우정이다. 하지만 우정이라는 가치를 삶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두고 있다면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퇴장으로 장이 바뀌어버릴 위험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주인공인 나의 입장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친구들에게 내게 벌어진 사건·사고를 전하며 그들에게 말을 걸 것이다. 친구들과 만날 시간을 빼려고 스케줄을 이리저리 조절할 것이다. 친구들에게 시간과 마음만 쓰는 게 아니라 돈을 쓰게 되는 날이 오면 좋을 텐데, 아직은 요원해 보이니 일단 쓸 수 있는 것은 쓴다. 쓰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혹시라도 정말 우정에 재능이 있다면 내 친구들이 등장하는 내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써보고 싶다. 아마 난 이러려고 작가가 된 것 같다. 누군가의 친구가 되려고.
윤이나 거의 모든 장르의 글을 쓰는 작가. 드라마 〈알 수도 있는 사랑〉을 썼고, 〈라면: 물 올리러 갑니다〉 외 여러 권의 책을 냈다. ‘여성이 만드는 여성의 이야기’의 ‘여성’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