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세대를 휩쓸었던 '안상수체'의 안상수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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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세대를 휩쓸었던 '안상수체'의 안상수

디자인 황무지에서 그래픽 디자인과 타이포그라피, 아트디렉팅까지 펼쳐왔던 안상수의 현재

ELLE BY ELLE 2022.06.21
 

Graphic Designer and Typographer

Ahn Sang soo 

자신의 이름은 담은 글꼴인 ‘안상수체’로 잘 알려진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타이포그래퍼 안상수는 홍익대 시각디자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돌아보면 그의 행보는 늘 파격적이고 신선했다. 1985년에 발표한 탈네모틀 글꼴인 ‘안상수체’는 바탕과 고딕체에 익숙했던 사람들의 시선을 확장시켰고, 그가 아트 디렉터를 맡았던 잡지들은 편집디자인이 전무했던 시기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1988년에는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독립출판잡지 〈보고서/보고서〉를 발간했으며, 홍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로서 교직 생활을 마친 이듬해, 2013년에는 독창적인 커리큘럼을 내세운 타이포그래피 기반의 독립 디자인 학교를 설립했다. 전형적이지 않은 배움의 과정을 통해 디자인을 습득하는 ‘타이포그라피배곳’의 교육 철학은 개교 10주년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 뒤에는 남다른 디자인 인재를 육성하려는 안상수의 노력이 숨어 있다. 그는 창작과 교육 사이를 오간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세상의 변화에 맞서기도, 이해하기도, 유연하게 대처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리 글자, 한글이 있기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지금 이곳은 ‘타이포그라피배곳(PaTI, 파티)’입니다. 어떤 일들이 이뤄지고 있나요
오래전부터 창의적인 디자인 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혼자 3개월간 여행할 때 그때가 지금이라고 마음을 굳혔어요. 그 후 2012년에 퇴직해서 이듬해 이곳을 열었어요. ‘배곳’은 배우는 곳이라는 뜻의 우리 말 ‘배곧’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파주에 자리 잡은 이유는 출판단지와 가깝기 때문일까요
그 이유도 있지만 한적하고, 공기도 맑고, 서울과 접근성도 좋아서 자리 잡게 됐어요. 초반에는 긴장도 많이 하고,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겁도 났는데 되돌아보면 잘한 것 같습니다. 벌써 10년이 다 됐네요.
 
1991년, 제1회 비무장지대 예술문화운동 작업전을 위한 포스터. ‘해변의 폭탄 물고기(Bomb-Fish on the Seashore)’.

1991년, 제1회 비무장지대 예술문화운동 작업전을 위한 포스터. ‘해변의 폭탄 물고기(Bomb-Fish on the Seashore)’.

학교 이름에 타이포그래피를 내세우고 있지만 학생들의 결과물을 보면 표현방식이 다채롭습니다
타이포그래피는 디자인의 기초 과목입니다. 이곳은 타이포그래피 정신을 바탕으로 전반적인 디자인 교육을 익히는 곳이에요. 디자인뿐 아니라 시, 서예, 춤과 연극, 역사와 인문학도 배웁니다. 배우미들이 자신의 생각을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죠.
 
파티에서는 학생들을 배우미라 부르죠. 배우미들이 선생님을 날개라고 부르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교장, 학장이라는 말에는 관습이나 위계가 따라붙는 느낌입니다. 현 교육의 궤도를 벗어난 디자인 학교를 만든 건데 똑같은 단어를 사용한다면 의미가 없죠. 그래서 날개라는 말을 생각했어요. 스승은 제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이잖아요. 말 하나에도 자유로움을 담고 싶었습니다. 우리만의 길을 가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1995년에 디자인한 ‘강태환의 자유 음악 콘서트’ 포스터.

1995년에 디자인한 ‘강태환의 자유 음악 콘서트’ 포스터.

1985년에 안그라픽스를 설립했습니다. 편집과 서체, 아니 디자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국내에 전무했던 시기였습니다
출판과 편집 디자인, 그래픽, 타이포그래피를 총괄하고 싶은 포부로 스튜디오를 열었어요. 시작은 소소했지만 재미있는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6년 후에 대표직을 내려놓고 교수생활을 시작했어요. 학교에서 교직에 집중해 달라고 해서 고민했는데 모교에서 후배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없을 것 같아 그쪽을 선택했습니다.
 
홍대 시각디자인과에서 21년간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오랜 교직생활은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제 삶에서 참 의미있는 시간이었죠. 멋진 학생들이 많아 그들에게 긴장하고 배우기도 했어요. 내가 부러움을 느낄 정도로 디자인 감각이 뛰어난 학생도 많았습니다. 그때는 ‘내가 스승이니 너희보다 뛰어나고 대단하다’는 걸 보여주고 증명하는 게 교육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가르침은 일방적인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요.
 
동물과 식물,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의미를 담은 생명평화무늬 로고.

동물과 식물,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간다는 의미를 담은 생명평화무늬 로고.

1985년에 ‘안상수체’가 만들어졌어요. 타이포그래피를 잘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익숙한 글자입니다. 4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단정하고 현대적이며 혁신적입니다
잡지 〈월간 마당〉 아트 디렉팅을 할 때 마당체를 만들었고, 그 후 새로운 글꼴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한글 창제 원리에 근거한 안상수체를 디자인했습니다. 줄여서 안체라고도 부르지요.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글꼴이어서 새롭고 파격적이라는 반응이 많았어요. 주류 글꼴은 사각 틀에 맞춘 ‘네모 틀’ 형태가 대부분이었는데 안상수체는 ‘탈네모틀’ 글꼴이었기 때문이지요. 자동차도 상용 디자인을 만들기 전에 컨셉트 카를 만드잖아요. 처음에는 낯설어도 나중에는 일상화 돼요. 안상수체가 지금 모두에게 익숙해진 것처럼 말이죠. 나는 뭐든 세상의 흐름에 조금 빗겨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길게 보면 오히려 그게 더 생명력을 오래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 타이포그래피를 시작할 때는 아날로그 시대였지만 지금은 디지털 그 이상을 바라보는 시대입니다. 시대 변화에 따라 작업방식은 어떻게 변하고 있나요
안그라픽스는 처음부터 모든 제작 과정에 컴퓨터를 도입해 그래픽 디자인을 한 출판사입니다. 안상수체 역시 디지털을 바탕으로 만든 글자라 급진적인 변화 속에서도 유연할 수 있었어요. 디자인 초반의 스케치는 연필로 했지만 그 후의 모든 과정을 컴퓨터로 작업했습니다. PC에서 플로피 디스크에 담긴 캐드 프로그램을 돌리면서 한 획을 긋고 저장하기를 반복하며 만들었지요. 그래서 다른 서체보다 비교적 빠른 1991년에 컴퓨터용 서체를 만들었고 ‘아래아한글’ 프로그램의 기본 서체로 등록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요즘도 미세하게 손보고 있습니다.
 
파주의 한 카페에 전시된 안상수의 한글 문자도 ‘오눈오네’.

파주의 한 카페에 전시된 안상수의 한글 문자도 ‘오눈오네’.

오래전부터 디지털 방식으로 작업한 것은 미래에 타이포그래피를 소비하는 디지털 기기들이 점점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일까요
그런 건 아닙니다. 원래 컴퓨터로 작업하는 걸 좋아했어요. 손으로 정교하게 그리는 기술이 좀 부족했거든요. 컴퓨터 작업은 약점을 보완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어요. 물론 재미도 있었고요.
 
안상수체 외에 이상체, 마노체, 미르체 등도 디자인했습니다. 그런데 서체의 이름 뜻을 알고 보면 참 애틋합니다
이상은 작업실에 사진을 붙여놓고 바라볼 정도로 좋아하는 시인이에요. 서체를 다 만든 후에 이상과 느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그에게 헌정하는 의미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미노와 미르는 아이들의 이름입니다. 처음부터 아이들에게 주는 영원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진중한 마음으로 만들었지요.
 
2017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날개, 파티〉 전의 전경들.

2017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날개, 파티〉 전의 전경들.

선생님께서 선호하거나 특별히 아끼는 글자체가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안상수체를 가장 좋아합니다. 이름을 담았으니 나와 같고, 내가 만든 글꼴 중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지고 널리 쓰이기 때문에 남다른 애착도 느낍니다.
 
오랫동안 한글을 바라보고 몰두해 왔습니다. ‘한글은 디자인된 글자’라고도 했는데 디자이너의 눈으로 봤을 때 한글이 아름다운 이유는
여기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세요. 훈민정음이 처음 공개됐을 때 함께 펴낸 책이에요. 한글에 대한 자세한 안내, 그러니까 매뉴얼 북인 셈인데 이 책의 편집이나 한글을 한 자, 한 자 나열하는 방식 같은 것들이 굉장히 현대적입니다. 옆에 있는 한자와 비교해 보면 정말 간결하고 아름다워요. 40년 동안 한글을 바라보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전혀 질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지루할 틈이 없어요. 외국 디자이너들에게 한글을 보여주면 그들 역시 글자 형태가 그래픽적이라고 말합니다. 한글 창제는 당시에 아이폰이 출시된 것처럼 굉장한 충격이었을 거예요.
 
2017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날개, 파티〉 전의 전경들.

2017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날개, 파티〉 전의 전경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잡지 〈멋〉과 〈마당〉, 〈꾸밈〉을 통해 아트 디렉팅도 담당했습니다. 〈과학동아〉는 제호를 디자인했고요
잡지는 매달 새로운 기사와 디자인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여느 출판물과는 다른 생명력이 있습니다. 잡지를 만든 시간은 나에게 편집디자인의 또 다른 재미를 일깨워준, 매우 즐거운 순간이었어요. 잡지라는 말도 좋아요. 다양한 분야의 기사를 한데 모아 또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그래서 1988년에는 독립출판잡지 〈보고서/보고서〉도 창간했죠
 
〈보고서/보고서〉는 한글을 소재로 조형적인 디자인을 보여주는 잡지입니다. 선생님의 특정한 포즈인, 한 손으로 한쪽 눈을 가리고 찍는 ‘원 아이(One Eye)’ 사진도 〈보고서/보고서〉 표지에서 처음으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의미 없이 놀이처럼 찍은 포즈인데 사람들이 의미를 더해줘서 점점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 뒤로도 그 포즈로 찍고, 만나는 사람마다 기념으로 포즈를 취해 보라 해요. ‘원 아이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인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인 블로그에 원 아이 사진을 올리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모을 생각입니다. 2013년에는 원 아이 사진을 모아 중국 심천에서 사진전도 연 적 있어요. 이런 아카이브가 모이면 또 다른 결과물이 생기기도 하더라고요.
 
2017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날개, 파티〉 전의 전경들.

2017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날개, 파티〉 전의 전경들.

일전에 최병훈 선생님의 전시 포스터를 안상수 선생님께서 디자인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두 분의 연결 고리가 놀라웠습니다. 오랜 시간 서로의 예술과 미학을 나누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인이자 친구인가 봅니다
최병훈 선생은 홍대 입학 동기예요. 나중에 전공이 달라졌지만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요. 비슷한 시기에 교직생활도 같이 했고요. 그 인연으로 전시 포스터를 디자인해 주기도 했습니다. 승효상 선생도 동갑내기인데, 같이 작업하고 여행도 가는 사이지요. 그리고 〈보고서/보고서〉를 함께 창간한 조각가 금누리 역시 입학 동기이자 40년 지기 친구예요. 서로 분야는 다르지만, 참 좋아하고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고 예술적 영향도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모두 존재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든든하고 따뜻해지는 사람들이지요.
 
알파벳이 시작되는 글자, a와 한글이 끝나는 글자, ㅎ이 연결된다는 의미의 작품, ‘Alpha_to_Hiut’, 2002.

알파벳이 시작되는 글자, a와 한글이 끝나는 글자, ㅎ이 연결된다는 의미의 작품, ‘Alpha_to_Hiut’, 2002.

올해 하반기에 준비하고 있는 일은
베이징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입니다. 몇 년 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 〈날개. 파티〉를 대만으로 옮겨 전시한 적 있어요.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전시가 그대로 해외 미술관에서 열리는 건 개관 이후 처음이라더군요. 그다음 순서가 베이징이었는데 팬데믹으로 미뤄졌어요. 올해 반드시 성사되면 좋겠습니다.
 
〈날개, 파티〉전에 전시된 안상수의 문자도 ‘홀려라’ 시리즈.

〈날개, 파티〉전에 전시된 안상수의 문자도 ‘홀려라’ 시리즈.

요즘 어떤 순간이 가장 즐겁나요
일할 때가 가장 즐거워요. 일한다는 건 그 사람의 존재와 가치, 능력 등 여러 가지를 포괄하는 행위입니다. 경제활동 그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오늘처럼 창밖에 피어 있는 봄꽃 향기도 맡으면서 일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이렇게 숨쉬며 살아 있는 한,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은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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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컨트리뷰팅 에디터 정윤주
    디자인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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