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개장한 경복궁의 고즈넉한 풍경, 줄리언 오피의 ‘걸어가는 사람들’이 담긴 서울 스퀘어 미디어 파사드, 밤이면 은은한 빛을 발하는 국립중앙박물관, 부산 바다를 물들이는 광안대교의 불빛까지.
조명 디자이너 고기영이 만든 밤의 풍경이다. 고기영이 있기 전, 한국에는 조명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이화여자대학교 장식미술과에서 수학한 뒤,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아키텍처 라이팅 디자인 코스를 밟은 그는 대전 엑스포를 계기로 한국에 처음 조명설계 개념을 도입한 회사에서 일하며 조명 디자인의 세계로 들어섰다. 조명 디자인이 전기 설비 취급을 받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고기영은 한국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빛과 어둠의 경험을 설계해 왔다. 24년. 한국 1세대 조명 디자이너이자 ‘비츠로앤파트너스’ 대표인 고기영이 굳센 기백으로 빛을 심어온 시간이다.
2020년 3월호로 〈엘르〉와 만났을 때 “어떤 길을 내가 처음 밟는 짜릿함이 동력”이라고 했던 말씀 기억하세요? 근래 선생님에게 동력이 된 것은 무엇인가요
팬데믹을 겪으며 공간에 대한 생각이 급변했음을 느꼈어요. 특히 오피스 빌딩 프로젝트가 많아졌습니다. 업무 환경의 필요와 요건이 달라진 거예요. 오피스를 위한 조명 디자인을 의뢰한다는 건 굉장히 새로운 변화예요. 이런 시절을 맞으며 빛 디자인이 확실히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어요. 멀리서 보는 빛, 랜드마크의 빛이 아니라 생활 속으로 들어온 빛이 중요해졌죠. 내 공간에서, 나와 감성을 나눌 수 있는 빛이 뭘까 궁금해하는 것 같아요.
2020년 겨울에는 삼청동 국립민속박물관 입구에서 시작되는 시즌 그리팅 조명 프로젝트를 선보였습니다. 전시공간뿐 아니라 거리에서도 빛이 완전히 ‘인스톨레이션’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어요
일종의 퍼블릭 아트라 할까요? 우리 업무 영역이 확장된 거죠.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지역 상권을 활성화하는 측면에서 제안한 일이었어요. 로맨틱하지만 전혀 새로운 분위기로, 전형적인 크리스마스 조명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해보고 싶었죠. 그랬더니 종로구청에서 겨울이 지나도록 떼지 않고, 얼마 전까지도 붙어 있더라고요. 2년이 지났으니 이젠 좀 위험할 것 같아서 떼어내야 한다고 몇 번 말했죠.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는 6월부터 6개월 정도 라이트 인스톨레이션을 했어요. 미디어 아티스트들과 함께 ‘빛의 정원’이라는 컨셉트로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빛도 조금만 더 좋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고안하면 새로운 기쁨을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이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거죠.
건축가 마리아 보타가 설계한 남양성모성지 마리아 대성당.
오랫동안 건립 중인 남양성모성지 내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마리아 대성당을 비롯한 공간에 조명설계를 했습니다. 최근 고무적이었던 작업은
한미약품 별관을 짓고 있어요. 건축가 민현식 선생님과 함께합니다. 설계하는 것 좀 도와달라고 하셔서 협업 중이죠. 민현식 건축가도 자연광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조명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저와 몇 번 작업한 다음, 이런저런 협업을 요청합니다. 선생님 생각이 조금 바뀌었구나, 빛을 디자인한다는 개념이 당신의 건축에 영향을 주는구나 싶어요.
‘비츠로앤파트너스’를 설립해 조명 디자인 분야를 개척하기 시작했을 땐 조명이 설비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은 빛 디자인 여건이 많이 나아졌다고 느끼겠습니다
처음 빛 디자인에 눈뜬 계기 중 하나가 대학원 시절, 어느 설계사무실에서 인턴을 할 때였어요. 조명의 레이아웃을 그리는데, 그 조명이 공간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몰라 선임에게 물으니 “글쎄, 밝겠지” 하는 거예요. 그때 처음으로 이 분야를 개척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진 거죠. 예전에는 조명 디자인 이야기를 던지면 반응이 없었어요. 근데 이젠 반응이 와요. 발주처가 됐든, 사용자가 됐든 반응이 옵니다. “분위기 좋던데요.” “편안했어요.” “화려한 건 없었는데 고급스럽고 뭔가 다른 느낌이었어요.”
국립중앙박물관의 조명설계 작업은 국내 최초로 토털 조명설계 계약이 성사된 특별한 기회였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프로젝트로 종종 꼽으셨죠. 한국의 조명 디자인 분야를 선창해 온 입장에서 지금껏 가장 잘한 일로 여겨지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역시 나인브릿지 골프클럽 리조트죠. IMF가 터진 후, 나인브릿지 작업을 맡게 돼 직원 한 명을 데리고 사무실을 열었어요. 그것이 ‘비츠로앤파트너스’의 시작이었어요. 요즘은 공간을 디렉팅할 수 있는 프로젝트로 나아가고 싶어서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설계를 끝낸 작은 호텔이 있어요. 오후 3시가 되면 어두워지는 공간이에요. 조명 디자인을 하려고 투입됐다가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하고 있는데, 저는 빛 디자인도 공간 디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또 하나는 대학교 프로젝트인데 학생들이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달라는 메시지 하나만 쥐고 시작했어요. 보통 인테리어 팀에서 평면도를 잡고 배치한 뒤, 조명을 넣는 순서로 작업이 이뤄지는데 이 경우에는 빛으로 전체적인 상황 설정을 하고, 그런 연출을 위해 인테리어가 백업해 주는 방법으로 하고 있어요. 거꾸로 된 거죠.
빛 디자인의 차원이 완전히 새롭게 확장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분야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체감하나요
일을 하면 할수록 더욱 깨닫고 있어요. ‘빛’이란 건 어떤 ‘상황’이에요. 우리는 3차원 공간에 살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 눈을 통해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장면은 2차원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빛은 3차원의 공간에, 손에 잡히지 않는 방식으로 감성과 표정을 불어넣어요. 3D 공간에 다른 차원을 드리우는 거죠. 이렇게 확장하다 보면 조명 디자인의 범주가 무궁무진해집니다. 인간의 공간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완전히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겁니다. 빛은 한 공간을 단숨에 다양한 분위기로 바꿀 수 있어요. 빛이 지닌 능력이자 매력인데 이것이 힘이자 의무, 책임이 되기도 해요.
고요하고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숲 사유원의 밤.
처음으로 빛 디자인에 눈뜬 계기가 대학시절에 들은 무대 디자이너의 특강이라 언급한 적 있습니다. “무대에서는 조명이 시공간을 바꾼다”는 이야기가 깊이 각인됐다고요. 조명 디자인 회사 ‘비츠로앤파트너스’를 운영하면서 조명 디자인의 기본 철학으로 삼은 것이 있다면
‘빛은 음악이다.’ 직원들과 항상 공유하는 아이디어예요. 조명 디자인은 상상력에 기반해요. 음악가가 2차원의 악보를 보고 음악이라는 청각적 소스를 상상하는 것처럼 빛도 마찬가지예요. 선으로 그려진 도면을 보고 빛과 어둠을 상상해야 하죠. 또 좋은 음악은 여러 템포와 세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져요. 빛에도 템포와 세기 조절이 필요합니다.
선생님이 작업한 경복궁과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야간 경관을 보면 잘 설계된 어둠이 뭔지 알것 같습니다. “조명 디자인이란 빛과 어둠을 설계하는 일”이라던 말씀도 생각났어요. 가장 잘 설계된 ‘어둠’으로 생각하는 장소는
제가 조명설계를 하기 전, 밤의 경복궁은 테마파크처럼 화려하고 환했어요.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밤에 경복궁을 걸을 땐 2020년대에 궁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있는 느낌보다 시간을 거슬러 500년 전, 왕이나 중전이 돼 이곳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면 했죠. 그래서 어둠을 많이 깔았어요. 그래서 자주 혼납니다. 왜 이렇게 어둡게 만들었냐고. 한 장소에서 과거의 경험을 끌어내거나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경험을 가능케 하는 재료가 빛과 어둠이라고 생각해요. 마침 요즘 빛과 어둠에 대한 책을 읽고 있어요. 그 책을 읽고 감동받은 어떤 분에게서 이 책의 분위기를 빛으로 표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열심히 상상하고 있어요. 빛 디자인으로 시작해 공간까지 설계할 수 있는, 빛 디자이너들이 적극적으로 공간 디렉팅에 나서는 프로젝트들을 막 시작하고 있어요.
이토록 새로운 접근과 시도를 위한 영감은 어디에서 오나요
책과 다큐멘터리, 음악일 거예요. 책을 많이 봐요. 3차원에 살면서 거꾸로 2차원의 것을 보면 상상력을 훈련할 수 있거든요. 또 책을 보면서 온갖 감각을 상상해요. 공간을 상상하고, 맛을 상상하고, 소리를 상상하고, 분위기도 상상하죠. 디자인은 자신의 틀에 갇히면 안 되는 작업인데 빛에는 틀이 없잖아요. 자유롭게 변신 가능한 재료이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걸 시도해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빛을 다루면서 가장 좋은 건 전체를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거예요. 저는 감히 ‘빛을 다루는 자가 공간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고 이야기하곤 해요.
1세대 조명 디자이너로서 현역으로 활동해 왔으니, 과거의 자신을 지금의 자신이 밟고 올라서서 다른 차원을 본 경험도 있었겠습니다. 혹 한계를 느꼈던 순간이 있었을까요
조명의 기본 단위가 필라멘트 전구에서 LED로 확장된 건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저는 LED라는 조명 방식을 끝까지 거부했던 사람이거든요. 정말 싫었어요. LED 이전까지 잘 해왔고 이제 정착하려는 중인데 너무나 새로운, 조명이라는 장르 전체를 뒤흔드는 변화가 생긴 거예요. 나도 LED를 잘 모르니까 총체적으로 새롭게 달라지거나 알아가야 했어요. 세상은 이미 변했고 내가 그걸 받아들이냐 아니냐 하는 건 내 문제인데, 내면에서 갈등을 겪었죠. 당시 LED는 기술도 지금과 달랐기 때문에 전구의 감성을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어요. 예전에는 설계만 했는데 LED가 출현하면서 시스템을 알아야 했죠. 복잡해지는 거예요. 같은 줄 알았는데 모두 다른 빛이고.
하지만 선생님이 서울스퀘어 외벽에 작업한 줄리언오피의 ‘걸어가는 사람들’이 재생되는 미디어 파사드는 LED로 만든 작품 그 자체였어요. LED 기술의 만개를 상징하는 장소가 됐죠. 스스로 느낀 한계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LED의 원천은 태양 빛이구나. 빛을 디자인할 때 제일 좋은 환경이라고 여기는 건 자연광이거든요. 하지만 자연광은 100% 재현할 수 없죠. 거의 근접한 수준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게 할로겐 시대에는 MR 전구였어요. 그런데 그것 또한 가만히 머물러 있는 빛이죠. 하지만 LED는 24시간 변화할 수 있어요. 이론적으로는 200만 가지의 색상 변화도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죠. 빛의 방식이나 온도도 모두 통제할 수 있어요. 그런 빛이 무척 두려웠고, 아주 천천히 장점과 단점을 비교해 가며 받아들였어요. 완전히 받아들이는 데 거의 10년 걸렸을 거예요. 그러니 ‘새로운 나’가 ‘지난 시절의 나’를 밟고 올라가는 용기가 필요했어요. 그래야 또 다른 차원, ‘넥스트 레벨’이 보이겠지요. 나는 지금도 매일 아침 새로운 세포들이 태어났다고 느끼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어제와 다른 일을 접할 수 있을 거라는 즐거움이나 설렘이 항상 있어요. 이런 마음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한국의 조명 디자인 업계를 선구해 온 입장에서 여전히 아쉬운 점이 있다면
파슨스에 아키텍처 라이팅 디자인 코스가 1984년에 생겼어요. 제가 5회 입학생이었죠. 그 학과의 탄생도 상상력에서 시작된 거였어요. 전기 전문가와 무대 디자이너가 함께 무대연출을 하며 다양한 조명 디자인을 고안해 봤더니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린 거예요. 이 개념을 건축으로 끌어오면 아주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해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런데 한국에는 왜 아직도 조명 디자인과가 없을까요.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는데 말이죠. 그 점이 참 아쉬워서 상황이 되면 라이팅 아카데미를 만들어 디자이너들을 재교육해 보고 싶어요.
오묘한 빛으로 물든 밤의 국립 아시아문화전당.
척박한 환경 속에 새로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으며 성공적인 커리어 맵을 그려왔습니다. 빛으로 이루고 싶은 넥스트 레벨이 있을까요
생각의 차원을 넘어서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빛의 차원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 언젠가는 시간을 넘나드는 경험을 빛으로 해보고 싶어요. 또 하나, 제가 아직 오로라를 못 봤어요. 어느 프로젝트 컨셉트에서 오로라를 표현했더니 클라이언트가 진짜 오로라를 만들어달라고 하더군요. 진짜 오로라와 같은 오로라는 만들 수 없겠지만, 빛으로 차원을 확장시키고 이를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물리적 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