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 사내연애 잔혹사 편〉(이하 〈기상청〉)에는 ‘결혼’이란 주제가 수없이 변주된다. 결혼과 파혼, 이혼, 비혼이란 상황에 날씨를 연결해 서사를 전개한다. 드라마 속 기준(윤박)과 유진(유라)은 결혼을, 하경(박민영)과 기준은 파혼을, 하경의 언니 태경(정운선)은 이혼했고, 비혼주의자인 시우(송강)를 따라 하경도 비혼주의자가 됐다. 그뿐인가. 하경의 엄마는 남편과 사별했으며, 시우의 가정은 도박꾼 아버지 때문에 위기를 겪고, 누군가는 아내와 별거 중이다. 한쪽에서 혼(婚)을 말한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별(別)을 얘기하며 ‘적정 거리’가 무엇인지를 계속 묻는다. 프랑스어로 결혼은 마리아주(Mariage)로, 두 사물 사이의 배합, 연합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마치 잘 차린 접시에 가장 어울리는 음료를 내놓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인간 사회의 모든 마리아주가 기후의 영향권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드물게 기상청을 소재로 다룬 이 드라마의 신선도 지수가 매우 높아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기상청〉은 기후의 속성과 연애의 속성을 싱크로율 높게 설정해 기후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작품 부제가 ‘기후도 (저 사람) 마음도 미치도록 맞히고 싶다’인 것에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명백하게 기후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기후라는 ‘비인간(Non-human)’이 주연을 맡았다고 볼 수 있겠다. 모두 기상 용어로 점철된 에피소드 제목들을 보라! 시그널, 체감온도, 환절기, 가시거리, 국지성호우, 열섬현상, 오존주의보, 불쾌지수, 마른장마, 열대야…. 이쯤 되면 ‘클라이드라마(Cli-Drama)의 탄생’이다.
클라이드라마는 기후 소설을 의미하는 ‘클라이메이트-픽션(Climate-Fiction)’을 내 식으로 변형한 말이다. 기후 소설(Cli-Fi)은 SF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하위 신생 장르로,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와 맞물려 탄생했다. 기후 소설이 건드리는 모든 소재는 인류세와 기후 위기 문제를 담고 있다. 지난해에 개봉한 프랭크 허버트 원작의 〈듄〉이나 킴 스탠리 로빈슨 등의 미국 작가가 대표적인 기후 소설의 주류다. 그러나 클라이파이와 달리 〈기상청〉은 기후 위기라는 용어를 대놓고 수면 위로 끌어내지 않는다. 작가는 ‘기후 위기’가 주는 디스토피아적 느낌을 배제하고, 기후를 달달한 직장 로맨스물로 치환하면서 인간 마리아주의 현실을 ‘단짠단짠’으로 풀어낸다. 기후에 주연을 양보한 이 드라마의 두 번째 주인공은 인간, 그중에서도 기상청 공무원들이다. 인간이 기상을 예측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년 전 즈음부터이고, 기상청 공무원은 기후가 가장 황폐화한 지난 100년을 대신해 기후와 맞서 싸우는 최전선(드라마에서 지금은 여름철 방재 기간이다)에 사는 인간을 대표하는 식이다.
그런데 탄탄대로를 걷던 능력 있는 공무원조차 기상청에서는 돌아가며 실수를 연발한다. ‘사람보다 기계(슈퍼컴이자 비인간)가 더 대접받은 지’ 오래된 씁쓸한 현실에서 이들의 약점을 기자들은 파고든다.
그런 한편 드라마는 오늘날 공무원이라는 자리가 사회적 동경을 받는 만큼이나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위치라는 점을 부각하려 한다. 공무원을 대표하는 진하경은 가족에게나 회사에서나 ‘독하다’는 말을 듣는다. 국가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기상청의 사명과 팀원의 실수를 책임져야 하는 과장이라는 책임감으로 무장한 채, 한편으로는 결혼을 원하는 부모의 기대를 애써 외면하되 사내 연애를 이어가는 하경은 직장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공감까지 이끌어낸다.
‘기후’라는 신종 캐릭터는 가변성이 특징이다.
작은 요소 하나만으로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는, 미세하고 예민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 프랑스 철학자 이자벨 스탱거의 말대로 ‘침입자이며, 간질간질하면 재채기하기 직전인’ 민감 주체다. 그래서 ‘연애잔혹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드라마는 인간이 지난 100년 자연과 결별한 후 벌어진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성층권에 있을 땐 지구를 보호해 주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지표면 가까이 생기면 인체에 해로운 오존처럼 기후도, 사랑도 어렵다. 기후를 주인공으로 인정한 ‘사람들’(인간)은 이제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자연 또는 기후와 새로운 마리아주를 상상해야 한다.
인도 출신의 소설가 아미타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에서 ‘현재의 기후 위기는 문화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임을 명시했다. 그런 점에서 이 신선한 클라이드라마 속 인간들이 기후 위기의 잔혹사를 뚫고 지구와의 마리아주에 성공하길 바라고 있다. 마침 지난 주말은 울진 산불을 꺼주는 봄비가 지구를 적셨고, 기상청의 예보는 적중했다.
이원진 〈니체〉를 번역하고,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를 썼다. 현재 연세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이 세상을 해독하는 가장 좋은 코드라고 믿는 워킹 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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