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예능은 뭐가 달라도 달라 #제시 #이영지 #비비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여자 예능은 뭐가 달라도 달라 #제시 #이영지 #비비

웹 예능과 유튜브, '여성 예능'의 미래는 TV 바깥세상에 있다. 지금 우리 앞에 새롭게 활짝 열린 길에 대하여.

ELLE BY ELLE 2021.05.23

Women,

PLAY IT COOL!  

 
 
고백하자면 퇴근 후 〈코미디 빅리그〉 유튜브 클립을 멍하니 보다 잠드는 나날을 몇 주째 반복하고 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때로 나를 수년 전의 코너로 인도하곤 하는데, 불과 몇 년 전 방송임에도 화들짝 놀랄 때가 많다. 여성 출연자의 외모를 개그 소재로 삼는 건 예사로(몸매와 얼굴 지적 외에도 성형 중독자, 꽃뱀 몰이 등 레퍼토리는 다채롭다), 폭력적이거나 위협적인 요소, 전형적인 ‘여적여’ 구도를 활용하기도 하고 심지어 감금된 성매매 여성을 연상시키는 설정도 있다. 지금이라면 마땅한 제재를 받았을 묘사가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허용된 게 불과 몇 년 전이라니! 심지어 저토록 많은 방청객이 문제의식 없이 웃었다니! 가장 대중적인 웃음 코드에 맞춰졌을 과거의  코미디 클립을 보며, 세상이 조금은 앞으로 가긴 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확인한다.  
 
35.9%. 서울 YMCA가 발표한 2020년 예능·오락 프로그램 출연자 중 여성 출연자의 비율이다. 처음 숫자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놀랍게도 ‘나쁘지 않은데?’였다.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19%대인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나를 이 정도 숫자에도 감지덕지하게 만든 걸까? 지난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감지된 심상치 않은 ‘기세’ 도 낙관의 이유였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늘어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지난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놀면 뭐하니?〉의 ‘환불원정대(엄정화 · 이효리 · 제시 · 화사)’, 〈나 혼자 산다〉의 여성 출연자인 한혜진 · 박나래 · 화사만 활용한 스핀오프 〈여자들의 은밀한 파티-여은파〉, 박세리를 필두로 남현희 · 곽민정 ·정유인 등 여성 운동선수끼리 ‘노는’ 모습을 그렸던 〈노는 언니〉, 오나라 · 제시 · 전소민 · 미주가 유재석 옆에 섰던 〈식스센스〉, 특전사 출신의 박은하 교관과 김성렬 · 김민경 · 이시영 등 여성 연예인이 위기 생존법을 배운 〈나는 살아 있다〉, 선미·하니·유아·청하·츄 20대 여자 아이돌이 ‘러닝 크루’가 되어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고 위로했던 〈달리는 사이〉, 김민경 · 박기량 · 윤보미 등이 사회인 야구에 도전한 〈마녀들〉 등. 여기에 연말 김숙의 ‘KBS 연예대상 수상’ 소식까지 더해지며 실제로 ‘여성 예능 전성시대’ 같은 기사가 쏟아지기도 했다.  
 
이런 ‘느낌적 느낌’은 올해 2월 한겨레의 분석 기사를 보고 산산이 깨졌다. 해당 기사가 예능 프로그램의 젠더 편향성을 알아보기 위해 내세운 세 가지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요 출연자 중 여성의 성비가 30% 이상일 것. 둘째, 여성 출연자에게 아내 · 며느리 · 딸 등 가부장적 성 역할을 부여하지 않을 것. 셋째, 여성 출연자에 대한 외모 평가를 하지 않을 것.’ 해당 기준에 따라 상위 12개 예능 프로그램의 1월 셋째 주(1월 18~24일) 방영분을 분석한 결과, 놀랍게도 이 예능형 벡셀 테스트를 통과한 프로그램은 〈윤스테이〉 하나뿐이었다.
 
물론 여성 출연자의 비율이 반드시 신선한 재미와 도덕적 우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전 연령, 불특정 대다수를 포용해야 하는 TV 예능 프로그램이라면 더욱 그렇다. 앞서 언급한 테스트의 첫 번째 기준인 여성 출연자 30% 이상을 충족한 프로그램 중 대부분은 결혼생활을 다룬 것이었다. 정상 가족과 가부장제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부부 예능’ 이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성비를 보장해 준 것이다. 〈1호가 될 순 없어〉나 〈우리 이혼했어요〉 〈동상이몽2-너는 내 운명〉이 여기에 속한다. KBS Joy에서 올해 2월 선보인 〈썰바이벌〉의 메인 MC 세 명은 김지민 · 박나래 · 황보라로 모두 여성이지만, 여성이 대부분인 사연자의 ‘썰’에 호응하는 방식에서 ‘여성’의 입장이나 새로운 관점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도대체 며느리인 자신의 학벌을 탐탁지 않아 한 끝에 아들에게 명문대 출신 전 여자친구를 다시 만나라고 권했다는 시아버지 사연을 들으며 남편과 시아버지 중 누가 더 나쁜지를 왜 골라야 하나?).
 
2015년 송은이와 김숙이 ‘비보 티비’를 통해 새로운 흐름을 쏘아 올렸듯, 여전히 여성 예능인들의 활약은 TV 밖에서 이뤄진다. 한국 사회가 교포 출신 여성에게 기대하는 전형적인 캐릭터상을 단편적으로 수행하는 듯 보였던 제시는 유튜브 시리즈 〈제시의 쇼!터뷰〉를 통해 입체감을 얻었다. 항상 한국어 실력을 지적받았던 제시가 20여 분의 토크쇼를 충분히 이끌 능력이 있다는 것,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닌, 실제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 덕이다. 〈맛있는 녀석들〉 중 한  ‘녀석’을 담당했던 김민경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한 것은 ‘오늘부터 운동뚱’이었다. 〈미선 임파서블〉로 팬 연령층을 ‘확’ 낮추는 데 성공한 박미선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1월 공개된 〈여고추리반〉의 성공은 이 흐름의 좋은 분기점이 되어준다. OTT 콘텐츠이자 티빙의 첫 오리지널 예능 프로그램인 만큼 우려도 있었지만, 다섯 명의 여성 출연자(박지윤, 장도연, 재재, 비비, 최예나)가 ‘새라여고 학생’이 되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이 독특한 예능의 첫 번째 시즌은 성공을 거두며 단번에 시즌2 제작이 정해졌다. 검증된 베테랑 여성 예능인들이 많게는 스무 살까지 차이가 나는(박지윤 전 아나운서는 1979년생, 아이즈원 멤버인 최예나는 1999년생이다!) MZ 세대 여성들과 같은 교복을 입고 친구처럼 똘똘 뭉친 이 프로그램의 매력은 무엇일까? 〈아무튼, 예능〉의 저자인 칼럼니스트 복길은 일단 ‘재미’를 꼽는다. “학원물과 탐정물이라는 인기 장르를 성공적으로 섞었을 뿐 아니라, 기존 〈여고괴담〉 시리즈가 만들어놓은 이미지를 쉽게 차용할 수 있는 ‘여자고등학교’로 배경을 좁혀 몰입감을 높였다. 전 출연자가 여성이며, 쇼 안에서 그들이 모두 청소년이라는 설정도 유효했다. 정종연 PD의 이전 작인 〈대탈출〉이나 〈더 지니어스〉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새로운 시청자 층이 실제로 이 프로그램의 팬덤으로 결집했다.” 출연자인 재재, 비비, 최예나가 모두 90년대생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복길은 ‘MZ 세대’ 여성이 미디어에 본격적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MZ 세대는 전문성을 제한하지 않고 다중 페르소나에 익숙하다. 비비와 이영지는 모두 뮤지션이지만 틱톡,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자기 자신을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 삼고 브랜드로 키울 줄 아는 인물이다. MZ 세대 소비자들은 흐려진 영역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해석한다. 성공한 시니어 여성 중심의 예능과 함께 이들 세대가 예능의 주연이 될 때 미래의 미디어는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상황은 꽤 순조로워 보인다. 〈문명특급〉의 성공 이후 〈독립만세〉를 비롯한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도 꾸준히 존재감을 알린 재재는  5월에 개최될 제57회 백상예술대상 여성 예능상 부문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4월 3일 첫 방송을 한 KBS2 〈컴백홈〉에서 이영지는 유재석, 이용진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여성들을 지켜보며 시청자로서 우리가 점검해야 할 태도가 있을까? 배우 구혜선은 얼마 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좋은 강연이라 공유한다”며 글을 올렸다. 10년 넘게 대중문화에 대해 글을 써온 최지은 기자의 〈세바시〉 영상 제목은 ‘우리가 여성 연예인을 더 쉽게 미워하는 이유’였다. 강연에서 최지은 기자는 남성 연예인이 범죄와 혐오 발언으로 ‘비호감’이 될 때 여성 연예인은 불분명한 이유로 쉽게 미움을 사는 현실을 언급하며, 이는 사회가 용인하는 여성성이 남성의 그것에 비해 한정되어 있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특히 그게 사생활 문제라면 비난하기 전에 조금 더 기다려보면 좋겠어요. 선정적인 보도가 가슴 아픈 결과로 이어지는 걸 우리는 이미 봤잖아요. 잘못에 대해서만 비판합시다.” 여성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 우리도 훈련이 필요하다. 
 
플랫폼을 가리지 않고 조금씩 넓어지는 여성들의 활약을 시대적 요구의 반영으로 봐도 좋을까? 복길은 방송사가 ‘젠더 감수성’이라는 용어와 함께 변화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했다는 데는 동감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여전히 한국 예능에서 ‘페미니즘’은 갈등을 조장하는 금기어다. 〈여고추리반〉의 성공 또한 출연자 본인의 정체성보다 가상의 캐릭터와 설정을 앞세웠기 때문일 확률히 크다.”  ‘여성’임을 드러내야 하지만, 동시에 잘 숨겨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묻는다. “이 문제는 예능은 왜 ‘항상 웃음만을 줘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확장할 수 있다. 누군가가 성공적으로 기존 질서에 적응하고 안착하는 것이 코미디의 본질은 아닐 테니까.” 〈달리는 사이〉에서 함께 산길을 달리던 하니와 유아는 “오르막길은 뛰어도 뛰어도 뛰는 것 같지 않아”라면서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말한다. “그래도 분명히 가고는 있다는 것!” 이 산뜻하고 씩씩한 한 마디가 막 본격적으로 시작될 레이스를 지켜보는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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