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기복이 청춘의 특권이라면,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감정의 동요를 다스리는 몇 가지 해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돼요. 그러면서 강해지고요.
오렌지 니트 톱과 네이비 리나일론 슬리브 톱은 모두 Prada. 이어링은 Portrait Report.
봄이 완전히 무르익었어요. 한창 드라마 〈마인〉 촬영 중일 텐데
요즘 일상은 그러니까요. 일해야 되는데 날이 너무 좋아요. 쉴 때만이라도 반려견 ‘꼬맹이’를 데리고 나가 한강을 걷거나 골프를 쳐요. 공이라도 시원하게 치다 보면 스트레스가 좀 풀리거든요. 혼자 한강을 거닐 때와는 다르게 사람들 만나 시시콜콜한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고요.
스타일 하나까지 치밀하게 계획하는 배우로 알려져 있어요. 이번에 연기할 정서현은 재벌가 첫째 며느리이자 갤러리 대표이기에 스타일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요
스타일에 힘을 준다고 줬는데 세트장이 너무 으리으리하다 보니 제가 묻혀요. 아무리 화려하게 입어도 모니터할 때 보면 자꾸 부족한 느낌이 들더라니까요. 차라리 일상복에서 좀 차별화를 두려고 했어요. 집에서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정상적으로 입으면 안 돼요(웃음).
맥시 사이즈의 트렌치코트와 니트 톱, 와이드 팬츠, 아일렛 블랙 벨트, 이어링, 네크리스, 플랫폼 펌프스는 모두 Louis Vuitton.
타고난 품위와 지성을 겸비한 인물, 극도의 이성주의자’라는 인물 소개를 보니 김서형의 빈틈없는 카리스마를 또 한 번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상을 빗나가는 지점도 있을까요
정서현은 무언가를 포기한 대가로 얻은 것을 본능적으로 더 붙들고 사는 여자예요. 자신이 내린 선택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점점 더 냉철해지죠. 그가 포기한 것, 그게 바로 숨겨진 비밀이자 인물이 지닌 의외의 지점일 텐데요. 박원숙 선배님, 박혁권 선배님, (이)보영 씨…. 캐릭터의 향연 속에서 그 비밀이 제가 맡은 인물의 특이점이 되리란 생각에 어떻게 하면 더 매력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지 고심하면서 연기했어요.
이나정 감독과는 첫 만남이죠. 가장 많이 나눈 이야기는
정서현이 진짜 마음 깊은 곳에서 원하는 것이 뭔지, 중요한 사건 앞에서 과연 어느 축에 설 사람인지 등 목표와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했어요. 디테일도 디테일인데 감독님이 질문을 많이 던지는 분이더라고요. 저 혼자 고민하던 지점에 대해 먼저 물어볼 때도 있어서 놀랐죠. 배우가 자기 생각을 전달했을 때 최대한 받아들여주시고요.
메시 소재를 더한 블랙 재킷과 화이트 슬리브리스 톱, 레더 팬츠는 모두 Louis Vuitton.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선택한 것을 지키기 위해 혹은 잘 해내기 위해 애쓴다는 점이 비슷해요. 시련과 맞닥뜨렸을 때 흔들리기보다 어떻게든 잘 넘겨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사람이고요. 그 과정이 아무리 외롭고 힘들더라도 끝까지 책임지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문득 첫 방송은 어떤 식으로 감상하는지 궁금해지네요
첫 방송, 잘 안 봐요.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 TV 프로그램도 잘 안 보고 그냥 방송 나가고 사람들 연락 받으면 ‘그래?’ 하며 쫑긋거리는 편이죠. 〈아는 형님〉도 안 봤어요. 현장에서 정말 최선을 다해 임했으면 그걸로 된 거죠. 다시 보면서 ‘왜 이렇게 안 했지?’ ‘그때 생각했던 게 맞았으려나?’ 하고 아쉬워하는 게 싫어요.
레터링 티셔츠는 Gucci. 볼드한 링크 네크리스는 Numbering. 이어 커프는 Portrait Report. 레이어드한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마인〉 첫 화가 방영된 후에 듣고 싶은 이야기는
늘 똑같아요. 여태까지 보여준 모습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만 안 들으면 좋겠어요. 매번 연기하는 인물은 달라지지만 그 주체는 전부 김서형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묻어나오는 존재감이란 게 있잖아요. 감독님한테도 그런 걱정을 말씀드렸더니 이러시더라고요. “비슷하면 어때요? 전작에서 너무 잘해주셨는데. 그게 비치면 좀 어때요?” 바로 알겠다고 했어요(웃음).
〈아무도 모른다〉로 2020 SBS 연기대상 미니시리즈 장르 액션 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며 “힘든 시기일수록 우리 안의 영웅을 생각하며 이겨내자”고 이야기했죠. 당신만의 ‘히어로’는 누구인가요
제 자신요. 힘든 시기를 버텨냈을 때 나를 보듬어줘야 하는 건 ‘나’니까요. 2020년은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였고, 더욱이 연말이다 보니 한 해를 정리하는 듯한 느낌도 들어서 그 순간만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저를 향해 말했어요.
데님 재킷은 Levi’s. 화이트 프린트 티셔츠와 팬츠는 Re/done by 10 Corso Como Seoul. 펜던트 네크리스는 Portrait Report.
〈아무도 모른다〉는 첫 단독 주연작이기도 했어요. 오롯이 혼자 극을 이끌며 새롭게 느낀 점이 있다면
결국 다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구나, 또 한 번 느꼈어요. 솔직히 저도 사람인지라 작품을 고를 때 양가적 감정을 느껴요. 〈SKY 캐슬〉에서도 누구 하나 주인공 아닌 사람이 없었듯이 ‘어차피 다 함께 만들어가는 건데 타이틀이 뭐가 중요해?’ 하면서도 때론 ‘단독 주연’ ‘여성 중심의 서사’란 타이틀에 혹하기도 하는 거죠. 둘 다를 경험하고 나니 역시나 다 함께 하는 것이더라고요.
그럼에도 새롭게 신경 쓸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었을 테죠
기승전결 중에 이제까진 ‘결’만 보여주는 역할을 주로 맡아왔어요. 개인의 서사가 뚝 잘린 채 등장하는 인물을 연기할 때는 제한적인 분량 안에서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매 신마다 쏟아내야 하는 에너지가 컸죠. 하지만 주인공을 연기하면서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게 중요할 때도 많았어요. 그게 어색해 당시 감독님한테 “나 이렇게 편하게 연기해도 되는 거냐”고 물었는데, 원래 주인공은 그런 거래요. 때로는 주변 인물들에게 호흡을 맡기면서 자연스럽게 반응하라고 하시더군요. 문제는 제가 ‘적당히’를 모르는 사람이라 감독님 말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힘을 조절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어요. 새롭게 느낀 것이 많아요.
연기 경력 28년 차인 당신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연기가 있나요
항상 어렵죠. 전과 비슷해 보이는 캐릭터라도 막상 연기해 보면 또 다르고, 설사 비슷한 역할이더라도 이전과는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는 새로운 미션이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팬츠는 Gucci. 실버 링은 Hei. 골드 링은 모두 Portrait Report. 빈티지 티셔츠와 블랙 펜던트 네크리스, 블랙 레이스업 슈즈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갈피를 잡지 못할 땐 어떤 식으로 돌파구를 찾는지
본능을 믿어요. 직감이 좀 좋은 편이거든요. 제 마음에 드는 연기를 해냈을 때 보시는 분들도 좋게 느끼시는 경우가 많아요.
〈아내의 유혹〉 신애리부터 〈SKY 캐슬〉 김주영까지 이제까지 연기한 수많은 악역을 떠올릴 때 드는 생각은
겉으로 드세 보이는 사람이 정작 내면은 약한 경우가 많아요. 〈아내의 유혹〉에서도 신애리가 내면이 정말 강해서 그렇게 악을 쏟아내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해서라도 관심받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길 원한 거죠. 진짜 강한 사람은 정작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요. 스스로 강인하다고 느껴질 때는 내 마음을 빠르게 수습할 때요. 감정 기복이 청춘의 특권이라면,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감정의 동요를 다스리는 몇 가지 해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돼요. 그러면서 강해지고요.
반대로 스스로 한없이 연약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을까요
반려견 꼬맹이 앞에선 늘 약해져요. 그렇기에 가장 편안한 순간이고요. 저는 생각보다 되게 단순한 사람인데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 힘에 부칠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럴 때 이 친구가 참 많은 위로가 돼줘요.
화이트 슬리브리스 톱은 Monoha. 팬츠는 Cos. 링은 모두 Hei.
16년째 반려동물과 함께해오며 체감한 변화가 있다면
또 다른 생명과 정말 순수하게 교감하는 법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최근에 그걸 확실히 느낀 적이 있어요. 제가 20대 때 승마를 한 적 있는데, 그땐 너무 무서워서 울면서 탔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말을 탈 땐 하나도 무섭지 않고, 말과 마음이 통한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동물과 함께 있는 게 이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져요.
얼마 전부터 인스타그램 계정에 직접 그린 꼬맹이 그림을 업로드하고 있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눈, 코, 털 한 올 한 올까지 그림을 그리다 보면 아무래도 대상을 더 신경 써서 바라보게 되잖아요. 꼬맹이 사진이야 충분히 많지만 이젠 마지막이 얼마 안 남은 것 같다는 생각에 한 번이라도 더 바라보려고 시작했어요. 연기만 보고 살아온 사람처럼 비춰지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있어요. 가까운 사람들은 당신을 어떤 사람이라 말해 주나요 순수해서, 착해서 문제라고요. 물론 일적으로는 아니에요. 직감도 있고, 판단도 분명한 편이니까요. 그런데 일만 잘해요(웃음).
올곧게 길을 걸어간 사람은 결국 보상받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믿어요. 저도 그렇게 28년을 해왔고요. 한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가야 할 길은 내 두 발 앞에 항상 분명하게 보이는 법이죠. 제 주변만 봐도 느껴요. 다들 적어도 10년 넘게 한 가지 일은 열심히 했으니. 봐요, 전부 남아 있잖아요.